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눈길 고무신 (2023.12.22.)

― 광주 〈이것은 서점이 아니다〉



  큰고장과 서울에서 지낼 적에 고단하던 한 가지는 ‘신’입니다. 발에 꿰는 살림인 ‘신’은 으레 플라스틱덩이라 바람이 안 들어요. 고삭부리로 태어나 코머거리랑 살갗앓이로 고달피 어린날을 보낼 적에 ‘폴리옷’은 남이 입은 옷을 스치기만 해도 며칠씩 살갗이 빨갛게 부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슈트’라 일컫는 하늬옷을 차려야 점잖다고 여기지만, 이른바 ‘양복’ 옷감은 살갗앓이로 고단한 사람한테는 사나운 멍에입니다. 저는 ‘양복 입은 이’ 곁에는 아예 안 있으려고 합니다.


  2003년 가을부터 이오덕 어른 글살림을 갈무리하는 일을 하느라 충주 무너미마을에 깃들며 처음으로 고무신을 꿰었습니다. 고무신은 큰고장과 서울 옛저자 신집에서도 살 수 있더군요. 발가락과 발바닥이 숨쉴 틈이 많은 고무신을 만난 뒤로는 이제 한겨울에도 고무신만 뀁니다. 2003년에는 한 켤레 3000원이었고, 2023년에는 6000원입니다.


  눈덮인 광주로 살짝 마실을 나왔습니다. 고무신으로 눈길을 걷기란 만만하지 않고, 발가락도 업니다. 미끄러울수록 더 느긋이 걷고, 발가락이 얼수록 더 오래 쉽니다. 저녁에 만날 분한테 찾아가기 앞서 〈이것은 서점이 아니다〉에 들릅니다. 호젓한 골목길을 가만히 밝히는 마을책집입니다.


  어쩐 일인지 불이 훅 나갔는데, 불빛이 없으니 한결 고즈넉이 앉아서 책을 펼칠 만합니다. 우리 시골집은 조금 어둡게 건사하기에 밤이 익숙해요. 깜깜한 책집에 앉아서 살며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불이 없으면 별을 보면 됩니다. 불빛에 기대는 서울살림이 너무 퍼진 탓에 별과 해를 자꾸 잊게 마련입니다.


  누구나 다 다르게 마음을 다스리는 길을 배우는 하루입니다. 알고 보면, 나중에 뒤돌아보면, 곰곰이 새기면, ‘잘못·말썽·사달·저지레’는 없더군요. 다 다르게 겪는 수렁이나 굴레나 차꼬이기도 하면서, 다 다르게 헤치고 견디고 넘으면서 새롭게 거듭나는 길이에요. 다만,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으면 스스로 뉘우쳐서 깨끗하게 거듭날 일입니다. 저지레를 멈추고서 사랑으로 피어나는 길을 찾을 노릇이고요.


  전라남도에서 열 몇 해를 사노라니, 이 고장 적잖은 벼슬아치하고 글바치는 몇 가지 틀에 갇히거나 가두면서 숱한 ‘잘못·말썽·사달·저지레’를 두루뭉술 감추거나 덮더군요. 배우거나 고치거나 거듭나는 분이 뜻밖에 드물어요.


  하나하나 따지자면, 전남뿐 아니라 전북도, 경남과 경북도, 서울과 경기도, 엉터리는 다 엉터리입니다. 어른은 다 어른입니다. 고장 탓을 할 일은 없습니다. 별빛을 받아들이고 말빛을 새기면서 마음을 가꿀 적에 비로소 사람다울 수 있습니다.


ㅅㄴㄹ


《물망초》(요시야 노부코/정수윤 옮김, 을유문화사, 2021.5.30.)

《열화당 사진문고 : 도마쓰 쇼메이》(도마쓰 쇼메이 사진, 이안 제프리·최봉림 글, 열화당, 2003.3.1.)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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