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달이 떠오릅니다 삶창시선 70
박영선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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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4.1.10.

노래책시렁 390


《분홍달이 떠오릅니다》

 박영선

 삶창

 2023.4.13.



  열네 살로 접어든 작은아이는 자꾸 ‘어려운 말’을 쓰려고 합니다. 작은아이는 낱말책을 주루룩 뒤지면서 “국립국어원 및 국어학자 낱말책이 뜬금없이 어렵게 적은 뜻풀이”를 달달 외우려 합니다. 이 아이가 왜 이러나 하고 여러 해 지켜보며 이따금 “얘야, 네 입에서 흐르는 소리는 ‘네 말’이 아니야. 왜 네 마음을 네 말로 그리지 않고, 남이 적어 놓은 대로 외워서 너를 크게 세우려고 하니?” 하고 짚어 줍니다. 《분홍달이 떠오릅니다》를 읽는데, 무늬는 한글이되 영 우리말일 수 없는 글씨가 주루룩 흐르는구나 하고 느껴요. 우리는 설마 입으로도 이렇게 말을 할까요? 입으로는 이렇게 말을 않지만, 글로는 이렇게 써야 한다고 여기나요? “작은 구김들이 소란스럽다”는 오직 ‘시문학’에서만 나옵니다. “두드림은 경쾌하다”라든지 ‘비상구·잡초’ 같은 한자말도 으레 ‘시문학’에서 튀어나옵니다. 길을 바라보지 않으니, 풀을 마주하지 않으니, 나를 나로서 헤아리지 않으니, 자꾸 덩치만 키우려는 말잔치에 사로잡혀요. 삶을 여는 길로 글을 가다듬어서 펴려고 할 적에는, 겉무늬가 아니라 속살을 가꾸어 열매를 맺고 씨앗을 심을 노릇일 텐데요. “말에 흐르는 빛과 별과 씨앗”을 읽고 잇고 이곳에 있기에 임(님)입니다.


ㅅㄴㄹ


셔츠를 펼치자 / 작은 구김들이 소란스럽다 / 천천히 뜨거운 기운으로 밀고 나간다 / 누르고 지나간 자리마다 / 반듯하게 평등해진다 (다림질/34쪽)


발목까지 젖는다 / 젖은 신발은 두렵지 않아 // 돌아가거나 / 떠나거나 / 빗소리는 진행 중이다 (빗소리/45쪽)


지하철, 거울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인이 / 화장을 한다 / 콤팩트의 두드림은 경쾌하다 / 길다란 펜을 꺼낸 그녀 / 눈 위에 갈매기 한 쌍을 날렵하게 그린다 (눈―화장하는 여인/86쪽)


+


《분홍달이 떠오릅니다》(박영선, 삶창, 2023)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 모두 고맙다

5쪽


마른 풀 위로 사과가 떨어지고

→ 마른풀에 능금이 떨어지고

12쪽


쓸쓸한 나의 노래는 늘 낮은음자리

→ 쓸쓸한 내 노래는 늘 낮은자리

12쪽


나에겐 두 개의 심장이 있어요

→ 나한텐 가슴이 둘 있어요

→ 나는 두 가슴이 있어요

14쪽


소리 없이 떨어지는 잎들은

→ 소리 없이 떨어지는 잎은

18쪽


낡은 비상구만 즐비한 이곳에서

→ 낡은 뒷길만 가득한 이곳에서

→ 낡은 구멍만 넘치는 이곳에서

20쪽


잡초처럼 자라나 녹슨 꽃을 피웠다

→ 들풀처럼 자라나 고린 꽃을 피웠다

→ 수수하게 자라나 낡은 꽃을 피웠다

21쪽


셔츠를 펼치자 작은 구김들이 소란스럽다

→ 윗도리를 펼치자 작은 구김이 시끄럽다

→ 적삼을 펼치자 작은 구김이 시끌거린다

34쪽


반듯하게 평등해진다

→ 반듯하고 나란하다

34쪽


빗소리는 진행 중이다

→ 빗소리는 흐른다

→ 빗소리는 이어간다

45쪽


마트를 다녀온 그의 검은 봉지 안에서 커다란 쏘세지가

→ 가게를 다녀온 그이 검은 자루에 커다란 고기떡이

54


타오른다는 것은 발화점을 넘어섰다는 것

→ 타오른다면 불눈을 넘어섰다는 뜻

→ 타오를 때는 타는길을 넘어섰다는 말

59


콤팩트의 두드림은 경쾌하다

→ 꽃가루를 가볍게 두드린다

→ 꽃물가루를 톡톡 두드린다

86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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