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수다꽃, 내멋대로 51 책지게

― 쓰러지는 나날



  책으로 가득한 등짐을 짊어지고 한참 걷는다. 나는 왜 책짐을 이렇게 짊어지고서 한참 걷는가. 버스를 탈 수 있고, 택시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택시를 탈 만한 삯도, 버스를 탈 만한 삯까지도 몽땅 책값에 들이부었다. 2002년 10월 2일을 돌아본다. 워낙 날마다 여러 책집을 돌면서 책을 잔뜩 사들이는 탓에 ‘책값은 늘 맞돈(현금)만으로 치르기’로 다짐을 한다. 날마다 꼬박꼬박 돈터(은행)에 가서 조금씩 찾는다. 그리고 이 돈은 날마다 책값으로 송두리째 날아간다. 책 한 자락을 덜 사면 집으로 버스를 타고 돌아갈 수 있다. 책 서너 자락을 덜 사면 집으로 택시를 타고 돌아갈 수 있다. 책 예닐곱 자락을 덜 사면 짜파게티 하나에 밥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채울 일이 없으리라. 그러나 나는 날마다 책을 서른 자락이고 쉰 자락이고 사들여서 읽고 만다. 책을 서른 자락 사들이는 날은 책집에 서서 삼백 자락을 살폈다는 뜻이다. 책을 쉰 자락 사들이는 날은 책집에 서서 오백 자락쯤 헤아렸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렇게 많이 살피고 헤아리고 읽느냐고 묻는 사람은 어리석은가, 아니면 어진가? 나는 나보다 책을 훨씬 많이 사들여서 훨씬 많이 읽는 책벌레를 여럿 안다. 나는 이 책벌레 어르신과 동무한테 “님은 왜 이렇게 책을 많이 삽니까?”라든지 “님은 왜 이렇게 책값에 살림돈을 몽땅 쏟아붓습니까?” 하고 여쭙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나한테도 딱히 묻지 않는다만, 나는 스스로 읊는다. 주머니에 100원조차 남지 않았으나 헌책집 일꾼은 내 손에 삼천 원이나 오천 원을 도로 쥐어 준다. “최종규 씨, 집에 걸어가지 말고 버스나 전철이라도 타고 가십시오.” 때로는 “최종규 씨, 집에 버스나 전철을 타고 돌아가서 라면이라도 하나 사서 끓여 드십시오.” 사랑스러운 책집지기님이 내 손에 도로 쥐어 준 삼천 원이나 오천 원을 쥐고서 버스도 전철도 안 타고서 한두 시간을 그냥 걷는다. 걷다가 지치면 길불(가로등)에 기대어 서서 책을 읽는다. 등과 팔다리에서 흐르던 땀이 조금 식으면 다시 책짐을 지게처럼 짊어지고서 걷는다. 드디어 우리 집에 다다라 책짐을 모두 풀어놓고 나면, 어느새 홀가분한 차림새로 밤길을 나선다. 서울 독립문 〈골목책방〉 아저씨는 밤 열두 시에라야 비로소 가게를 닫는다. 〈골목책방〉 아저씨가 책집을 닫기 앞서 얼른 밤길을 달린다. 이러고는 마침내 삼천 원이든 오천 원이든, 남은 돈을 다 쓰고야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먹는가? 책에 적힌 이야기를 먹는다. ‘오롯이 나무로만 세운 나머지집(적산가옥)’은 골마루를 지나거나 디딤칸을 오르내리거나, 내가 사는 윗칸(2층)에 드러눕거나 책상맡에 앉을 적에도 늘 삐끄덕 소리를 낸다. 물꼭지를 틀어서 물을 마신다. 이튿날 일터(《보리 국어사전》 편집실)로 가면 낮밥이나 저녁밥을 얻어먹자고 생각한다. 책벌레는 밥을 먹지 않고 물을 먹고 바람을 먹고 이야기를 먹는다. 책벌레는 버스도 전철도 택시도 자가용도 타지 않는다. 책벌레는 책짐을 이고 진 채 걷는다. 걷다가 팔뚝이 결리면 살짝 멈추어 땀을 훔치고는 또 책을 읽으면서 쉬다가 다시 걷는다.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기에 밤나절에 마지막 책집마실을 마치고서 집으로 돌아오면, 더는 책을 펼 기운이 남지 않아 꼬르륵 쓰러지고야 만다. 날마다 쓰러진다. 날마다 까무룩 꿈나라로 간다. 밤이면 마치 죽은듯이 몸을 쉰다. 이른새벽이면 번쩍 눈을 뜨고는 어제 산 책을 되읽으면서 글을 쓴다. 어제 다녀온 책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을 짓는다. 책벌레가 왜 책벌레인지 밝히는 글을 여민다. 책짐을 부여잡고서 서울 시내 골목골목 거닐면서 ‘아직 내가 찾아내지 못 한 마을책집이 틀림없이 어느 골목에서 고즈넉이 나를 기다릴는지 몰라’ 하고 혼잣말을 한다.


ㅅㄴㄹ


2002년 10월 2일 일기를 옮겨놓는다.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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