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고정순 그림책 《가드를 올리고》 : 지난 2019년 가을, 전주 마을책집 〈잘 익은 언어들〉 지기님이 말씀하셔서 고정순이라는 이름하고 《가드를 올리고》라는 그림책을 처음 만났다. 이날부터 고정순 님 그림책을 찬찬히 보았고, 한 해 동안 이녁 모든 그림책을 천천히 다 읽어내면서 생각을 갈무리해 본다. 《가드를 올리고》를 비롯한 고정순 님 그림책을 보며, 이렇게 그림책을 짓는 분이 우리나라에도 있네 싶어 반가우면서, “가드를 내리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거나 살아 본 적이 없거나 사랑해 본 적이 없나 싶어 아쉬웠다. 짧고 굵게 말하자면, 아이를 낳아서 돌보면 된다. 아이를 낳지 않거나 못한다면, 이웃 아이를 돌보거나 같이 놀면 된다. ‘아이’란 0살부터 10살까지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갓 태어난 아기부터 바야흐로 어린이로 넘어서며 철이 들 무렵인 아이까지 두루 “가드를 내리고” 마주해 본다면, 고정순 님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빛나는 그림길을 열 만하리라 본다. 내가 보기로는 이우경 님 뒤로 아직 걸어 본 사람도 없고 열어 본 적도 없는 그림길이 태어날 듯하다. 한 가지를 잘 해내는 듯 보이는 사람은 많다. 두 가지를 잘 해내기 어렵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잘 해내야 하지 않는다. 그냥 하면 된다. 잘되거나 안되거나 따질 까닭이 없다. 그저 하면서, 그저 하는 동안 스스로 샘솟는 사랑을 지켜보고, 이 샘솟는 사랑을 그저 가없이 펼쳐 올려서 마음에 날개를 달고서 홀가분히 춤추고 노래하면 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렇게 그림책을 짓는 ‘어른’이 하나도 없다고 느낀다. 다만, 어린이 가운데에는 이렇게 그림꽃을 짓는 멋진 눈빛이 꽤 많더라. “가드를 올리고”란 싸우겠다는 뜻이다. “가드를 올리고”는 싸워서 네놈을 무찌르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제발 “가드를 내리고” 두 팔을 번쩍 들고서 폭 안아 주기를 빈다. 손에 동여맨 ‘글러브’를 벗어던지지 않는다면 풀꽃을 쓰다듬지 못 한다. ‘글러브’를 동여맨 손으로는 아기를 안지 못 한다. ‘사각링’도 ‘가드’도 ‘글러브’도 아닌, 풀꽃나무가 넘실거리는 즐거운 보금자리를 지으면서 마당에 나무를 심고 새를 부르면서 하루를 노니는 살림을 지어 본다면, 그림책이 ‘삶빛으로 환할’ 수 있으리라. 2020.12.7.


이 밑글을 쓴 지 세 해가 되어 간다. 2021∼2023년 사이에 새로 나온 고정순 그림책을 모두 챙겨서 읽어 보니, “가드를 더 올리고” 붓을 쥐었구나 싶다. 싸운대서 나쁠 일은 없다. 다만, ‘싸우는 그림책’은 ‘나쁜놈 좋은놈 갈라치기’를 할 수밖에 없고, 어린이한테도 어른한테도 ‘사랑 아닌 싸움’만 보여준다. 싸움(전쟁)을 보여주는 그림책을 마치 ‘평화 그림책’이라고 속이는 오늘날이다만, 사랑(평화)으로 누리는 삶을 보여주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평화)을 알거나 배우거나 물려받거나 나눌까? 싸우기(전쟁)만 하는 줄거리와 얼거리로 어떻게 사랑(평화)을 밝힐 수 있을까? “가드를 더 올리고” 붓을 쥐기에 나쁠 까닭은 없지만, 그린이부터 스스로 마음을 갉고 깎는 길이란, 길드는 굴레일 뿐이다. 2023.8.31.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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