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16 묻다



  우리말 ‘묻다’는 세 가지입니다. ‘파묻는’ 길이 하나요, ‘물어보는’ 길이 둘이요, ‘물드는’ 길이 셋입니다. 소리는 같되 쓰임새나 뜻이 사뭇 다른 세 가지 ‘묻다’입니다.


  글은 말을 옮긴 그림입니다. 한글을 으레 ‘소리글(표음문자)’로 여기지만, ‘묻다’를 비롯한 숱한 우리말을 하나하나 짚노라면, 한글은 ‘소리글 + 뜻글’인 ‘뜻소리글(표의표음문자)’이라 해야 걸맞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은 “소리만 담는 글”이 아닌 “뜻을 함께 담는 글”입니다.


  우리말 ‘묻다’를 알맞게 쓰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말 ‘묻다’를 도무지 안 쓰는 사람도 많습니다. 삶을 가꾸고 살림을 돌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수수한 사람들은 글을 모르거나 책을 안 읽되, 말을 말다이 여미어요. 글을 알거나 쓸 뿐 아니라 책을 많이 읽는 이들은 삶·살림·사랑하고 등진 채 ‘묻다’가 아닌 ‘중국스럽거나 일본스러운 한자말’하고 영어를 붙잡곤 합니다.


묻다 1 ← 매장(埋葬), 사장(死藏), 은닉, 은폐, 호도, 매립, 매몰, 장사(葬事), 장례, 장례식, 초상(初喪), 상(喪), 삽목


묻다 2(물어보다) ← 질문, 문의, 문제(문제점·문제적), 설문(設問/설문조사), 질의, 질문대답, 질의응답, 큐앤에이(Q&A), 상의(相議), 상담, 요구(요구사항), 요청, 간청, 권유, 대답 요구, 책임 요구, 전갈, 부탁, 청탁, 청구, 청원, 타진, 섭외, 장소섭외, 주문(注文/주문사항), 제언, 제시(제안), 제의(提議), 오퍼(offer), 제기, 제창(提唱), 문제 제기, 의뢰, 의심(의심스럽다·의심쩍다), 인터뷰, 조사(調査), 사찰(査察), 연구, 탐문, 탐색, 탐사, 신문(訊問), 심문, 허락, 신청, 고문(顧問), 시험(試驗), 시험문제, 취조, 발본색원, 수소문, 안부(安否), 문안(問安), 청취조사, 사정청취(事情聽取), 연락, 자문(諮問), 자문(自問), 구애(求愛/구애자), 구혼(구혼자), 청혼(청혼자), 프로포즈(프러포즈),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실례(失禮)합니다


묻다 3 ← 흔적이 남다


  우리말은 ‘묻다’ 하나가 아니기에 ‘파묻다’나 ‘끝장내다’나 ‘보내다’나 ‘감추다’나 ‘숨기다’를 쓰기도 합니다. ‘여쭈다·여쭙다’나 ‘알아보다·알리다’나 ‘캐다·캐묻다’나 ‘좇다·짚다’나 ‘찾다·찾아보다’나 ‘시키다’를 쓰기도 해요. ‘물들다’나 ‘붙다·들러붙다’나 ‘남다’를 쓰기도 하고요.


  미국사람은 ‘화이트 하우스’처럼 수수하게 말할 뿐인데, 막상 우리나라는 ‘하얀집·흰집’이 아닌 ‘백악관’으로 옮깁니다. ‘하우스’하고 ‘화이트’처럼 쉬운 영어를 쓴 미국인데, 우리나라 글바치는 ‘집’하고 ‘하얗다·희다’처럼 쉬운 우리말을 안 씁니다.


  기와가 푸른빛이라면 ‘푸른기와집’이나 ‘푸른지붕집’이나 ‘푸른집’입니다만, 이 나라 글바치는 애써 ‘청와대’처럼 이름을 붙였어요. 우리말로 쉽게 쓰면 멋도 안 나고 높지도 않다고 여기는 마음 탓입니다. 영어나 한자말을 붙여야 멋스럽거나 높다고 여깁니다.


하얀집 ← 백악관

푸른집 ← 청와대


  갖추거나 차려서 입는 옷이니 ‘갖춤옷’이나 ‘차림옷’이지만, 굳이 ‘양복’이란 한자말을 쓰는 우리나라예요. ‘수레’를 가리키는 ‘카(car)’를 그냥 쓰는 미국이요 영어인데, 우리는 ‘수레’를 새롭게 살리는 길을 아예 생각조차 안 합니다. 다만, 아이들이 ‘자동차’를 못 알아들으니 할매할배는 ‘부릉부릉’이나 ‘부릉이’처럼 소리를 흉내낸 이름을 쓰지요.


  이때에 생각해 볼 만합니다. 할매할배가 아이한테 “자, 우리 부릉이 타러 가자.” 하고 말한 지 무척 오래되었는데, ‘부릉이’를 ‘자동차·차·자가용’을 풀어낸 즐겁고 새로우며 쉬운 우리말로 언제쯤 삼을 수 있을까요?


  영어 ‘트레인’은 뜻이 대단하지 않습니다. 한자말 ‘기차’도 뜻이 대단하지 않아요. 할매할배는 아이한테 “오늘은 칙폭이 타러 갈까?” 하고 말합니다만, 이 ‘칙폭이’를 언제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삼으려나요?


부릉이 ← 자동차

칙폭이 ← 기차


  생각하는 사람은 눈망울이 반짝반짝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힘(권위)을 내세우려 하고, 눈망울이 죽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삶·살림·사랑을 짓기에, 말도 스스로 지으니,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여 지은 말을 ‘사투리’라 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힘을 내세우고 멋을 앞세우려 들더군요. 지난날에는 중국을 섬기거나 따르거나 우러르면서 중국말이며 한문이어야 한다고 여겨요.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니 스스로 말을 지을 줄 모르고, 글조차 스스로 안 짓습니다. 중국을 섬긴 이들은 중국글을 흉내내었을 뿐입니다.


  일본이 총칼로 치고들어와서 거의 마흔 해를 억누르다 보니, 이동안 이 나라 글바치는 거의 다 일본물이 들었어요. 일본말을 아주 잘 쓸 뿐 아니라, 일본글을 숱하게 써냈지요. 이들 글바치는 일본이 물러간 뒤에 “마흔 해나 써서 익숙하다면 일본 한자말도 우리말로 삼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희승이 엮은 《콘사이스 국어사전》은 일본 낱말책 이름인 ‘콘사이스’까지 베꼈는데요, 이만큼 속속들이 썩었어요. 일본 한자말을 섬긴 이들도 스스로 새말을 지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저 그들 스스로 익숙한 일본 한자말을 외워서 흉내내었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저는 늘 물어봅니다. 낡은 마음은 파묻으면 어떻겠어요? 낡은 마음을 파묻어야 겨울을 지나 새흙이 되어 새싹이 돋는 밑거름이 됩니다. 낡은 한자말로 쓴 흉내낸 글은 이제 떠나보내면 어떻겠어요? 낡은 말씨로는 새나라도 새마을도 새마음도 새길도 새글도 새넋도 새살림도 새터도 새빛도 새꿈도 못 그리게 마련입니다.


  이제는 사투리를 쓸 때입니다. 스스로 지은 새말인 사투리를 저마다 즐겁게 쓰면서 어깨동무할 때입니다. 어린이 눈높이로 바라보고 헤아리면서 말빛을 북돋울 때입니다.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묻지 않더군요. 묻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고이고 갇힌 채 흉내쟁이에 머물 뿐 아니라, 우두머리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가더군요. 묻지 않아 스스로 고이거나 갇힌 이들은 어린이를 바라보지 않고, 푸름이를 마주하지 않기도 해요. 나이가 들어 늙은 티를 낼 뿐, 스스로도 아기로 태어나 어린이로 살며 푸름이로 자란 삶길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풀꽃·풀꽃나무 ← 화초(花草), 무명초(無名草), 백화(百花), 백화초목(百花草木), 초목, 목초, 화훼, 화훼식물, 식물, 녹색식물, 자연(자연환경·자연조건), 대자연, 천지자연, 산야, 산천, 산하(山河), 산수(山水), 산천초목, 백성(백인百人), 백정, 민중(민초), 양민, 중생(衆生), 인민, 서민, 시민, 소시민, 불가촉(불가촉천민), 천민(賤民), 프티부르주아, 대중(대중적), 도민(道民), 만백성, 만인, 국민, -자(者), -인(人), -민(民), 잡상인, 잡스럽다(잡놈雜-·잡배雜輩·잡물雜物·잡다雜多·잡동사니雜同散異·잡종·잡학), 잡초(잡풀), 잡화(雜花/잡꽃), 무명화(無名花), 방초(芳草), 야생초, 허브, 약초, 약풀, 초야(草野), 생화(生花)


  풀꽃나무를 보기를 바라요. 산천초목도 식물도 백화초목도 떠나보내요. 백성도 시민도 서민도 인민도 민중도 국민도 대중도 아닌, 풀꽃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언제까지 잡초나 야생초처럼 낡은 말씨에 사로잡히려는지요?


  쉬운 말이기에 사랑이요 어깨동무(평화·평등)입니다. 안 쉬운 말이기에 미움이요 싸움이여 겨룸이며 다툼입니다. 쉬운 말이기에 어린이 마음을 읽고 나누면서 아끼고 돌봅니다. 안 쉬운 말이기에 어린이를 다그치고 나무라고 가르치고 길들이려 합니다.


  어린이는 부릉이를 안 몹니다. 어린이는 걸어다니다가 뛰고 달립니다. 숱한 어른들은 어린이 곁에서 걷지 않더군요. 어린이를 부릉이에 태울 마음은 있어도, 부릉이를 내다버리고서 어린이랑 손을 잡고서 걷고 뛰고 달릴 마음은 좀처럼 못 봅니다.


  둘레를 봐요. 안 걸어다니는 사람이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는 길(정책)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하고 손을 잡고서 느긋이 걷다가 놀다가 쉬다가 하늘바라기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배움수렁(입시지옥)을 걷어낼 생각을 할까요?


  참말로 스스로 물어볼 때입니다. ‘질문’ 따위는 집어치울 때입니다. 묻고 묻고 묻으면서 스스로 꽃으로 하늘빛으로 바람으로 거듭날 오늘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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