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멀리 가까이 (2023.6.10.)

― 부산 〈파도책방〉



  멀리멀리 갈 적에만 나들이(여행)일 수 없습니다. 마당에 내려서는 발걸음도 나들이입니다. 마루하고 부엌을 오가는 길도 나들이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는 바람을 한 줄기 쐬면서 볕바라기를 하는 살림도 나들이예요.


  날개를 타고서 옆나라로 가야만 나들이라 할 만하지 않습니다. 사뿐히 거닐며 골목마실을 할 적에도, 저잣마실을 다녀올 적에도, 우리 스스로 즐거이 빛내는 하루마실이자 하루길입니다. 마을책집을 찾아가는 길, 이른바 책마실하고 책길도 새롭게 마음을 틔우거나 밝히는 놀잇길이에요.


  붓을 쥐어 글 한 자락을 쓸 적에, 여태 아무도 안 썼다고 여길 만한 놀랍거나 대단하다 싶은 글감을 찾아내야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으레 쓸 만한 ‘삶’이라는 한 마디를 글감으로 삼아 ‘오늘 하루 이야기’를 쓸 만합니다. ‘나’라는 한 마디를 글감으로 놓고서 ‘내가 바라보는 여름’을 쓰면 되어요.


  먼먼 곳에도 이야기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우리 집이며 마을에도 이야기가 흐릅니다. 멧새가 들려주는 노래에도 이야기가 감돕니다. 풀벌레가 속삭이는 가락에도 이야기가 번집니다. 구름 한 송이랑 꽃잎 하나에도 이야기가 피어납니다.


  눈을 틔우기에 이야기를 알아봅니다. 마음을 열기에 이야기를 들어요. 생각을 키우기에 이야기씨앗을 심고, 사랑을 나누면서 이야기꽃을 두런두런 지핍니다.


  보수동 〈파도책방〉에 깃듭니다. 〈파도〉 지기님이 자리를 지키기도 하지만, 책집지기가 자리를 비운 ‘혼책집(무인책방)’으로 있기도 합니다. 여름볕은 후끈후끈 보수동 책골목으로 내리쬡니다. 골목집 마당에서 해를 먹는 나무를 바라봅니다. 골목길 한켠에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서 같이 해를 보는 길꽃을 들여다봅니다. 책 한 자락을 손에 쥐고서 슬슬 넘기다가, 볕이 드는 밖으로 나와서 책에 햇볕을 씌워 줍니다.


  우리 가까이에는 무엇이 있는가요? 우리는 곁에 어떤 숨결이 자라도록 북돋우나요? 손길을 탄 책이 새롭게 읽힐 날을 기다립니다. 미처 손길을 타지 못 한 채 잊힌 책이 비로소 읽힐 날을 기다리는군요. 모든 책은 다 다른 사람들이 온누리를 다 다르게 사랑하면서 지핀 살림새를 품습니다. 우리는 다 다른 책을 다 다른 눈길로 읽으면서 다 다른 이야기를 새록새록 담아 놓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책은 앞으로 열 해 뒤에 누가 새롭게 읽어 줄까요? 앞으로 서른 해쯤 뒤에 이 책은 누구 손길을 타면서 빙그레 웃음지을까요? 저 멀디먼 데에서 찾아오는 별빛이 밤에 반짝이고, 이 가까운 곳에서 살랑이는 들풀이 낮에 푸르게 춤춥니다.


ㅅㄴㄹ


《내 방 여행》(자비에르 드 메스트르/장석훈 옮김, 지호, 2001.4.10.)

《그 섬에 내가 있었네》(김영갑, Human & Bokks, 2004.1.20.첫/2010.8.9.16벌)

《스파시바, 시베리아》(이지상, 삼인, 2014.8.10.)

《가까이》(이효리, 북하우스, 2012.5.24.첫/2012.6.8.3벌)

《新潮世界文學 19 トルストイ 4》(トルストイ/木村 浩 옮김, 新潮社, 1970.6.20.첫/1975.6.15.3벌)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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