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3.6.8.
수다꽃, 내멋대로 45 생일이 없다
밤늦도록 술에 절어 들어오던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언니나 내가 태어났다는 날에 이따금 ‘아주 늦지는 않게’ 밤 열두 시나 한 시 무렵에 들어오면서 달콤이(케익)를 부엌에 던지곤 했다. “이 집안 가장이 들어왔는데 벌써 자빠져 자는 놈들이 어디 있어?” 하고 큰소리를 치면서 “생일이라서 케익을 사왔으니 어서 일어나서 먹어야지!” 하고 또 큰소리를 보탠다.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자다가 먹어요. 이튿날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 되지.” 하고 말리면 언제나처럼 주먹이 춤춘다. 나는 왜 ‘달콤이(케익)’를 못 먹는 몸이 되었을까? 집안이 돌아가는 꼴을 보다가 숨이 막히면서 속에서 갇히지 않았을까? 여덟아홉 살 무렵부터 스물한 살에 이르도록 ‘생크림케익’이라는 것을 한 입이라도 먹으면 바로 게웠다. 자다가 일어난 한밤에 억지로 ‘술에 전 아버지 앞에서 달콤이를 몇 입’을 먹다가 또 게우니 “이놈의 자식들, 모처럼 비싼돈 들여서 사온 케익을 뱉어?” 하면서 두들겨팬다. 처음으로 달콤이가 몸에 받던 날을 돌아본다. 스물한 살이었을까. 강원 양구 싸움터(군대)에 들어가서 배를 곯으며 짐(완전군장)을 지고서 한겨울에 멧길을 밤새 오르내리던 어느 날, 열여덟 시간째 쉬잖고 걷다가 지치려던 즈음, 멧자락에 그득 쌓인 눈을 손으로 떠먹으며 “이 눈은 케익이야. 난 여태 케익을 못 먹었지. 그러나 살아남으려면 이 케익눈송이를 먹어야지.” 하고 스스로 말씨앗을 심었다. 싸움터에서 첫 쉼(휴가)을 받아서 바깥(사회)으로 나온 날, 동무들이 물었다. “너 뭐 먹고 싶어? 다 사줄게. 고생 많잖아.” “케익 둘 사줄래?” “너 케익 못 먹잖아? 어쩌려고?” “그래도 먹어 보게. 군대에서 날마다 눈을 퍼먹었으니 먹을 수 있을는지 몰라.” 이날 밤, 혼자 ‘생크림케익’을 둘 통째로 다 먹었는데 처음으로 안 게웠다. 어릴 적부터 난날(생일)을 반기지 않았다. 제발 조용히 넘어가기를 바랐다. 누가 “생일 언제예요?” 하고 물으면 “모든 하루가 새로 태어난 날입니다.” 하고 대꾸하며 넘겼다. 내 난날(생일)도, 우리 집 네 사람 난날도, 둘레 누구 난날도 안 챙긴다. 아이들하고 으레 “우리는 밤에 잠들어 아침에 눈뜨는 모든 하루가 새로 태어난 날이야. 한 해 내내 새롭게 태어나는 셈이지. 어느 하루만 ‘태어난 날’이지 않아.” 하고 얘기한다. 이런 우리 집을 둘레에서는 ‘너무 무뚝뚝한 사람들’이라고 핀잔을 하는데, “그날 하루뿐 아니라 삼백예순닷새가 우리 난날(생일)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아침에 서로 얼굴을 보면 늘 기뻐요!” 하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문득 “알면 알수록 힘들다” 하고 말하지만, ‘알다’를 참답게 ‘알’ 적에는 힘든 일이 없구나 싶다. 그러니까 ‘앎(알다·알·알맹이·알차다·알뜰살뜰)’이 아닌 ‘앎 가까이’나 ‘아는 척’이나 ‘아는 듯’일 적에 힘들 수 있구나 싶고. ‘앎(알)’이기에 허물을 벗고서 깨어난다. 아기란, 알을 깨어난 숨빛이다. 어른(얼)이란, 알을 깨어나고 자라서 빛이 무르익어 철든 숨결이다. 아기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는 길은 ‘알아가는 길’이기에 가시밭길이나 고단한 나날이기 일쑤이다. 아직 ‘앎(알)’이 아닌 ‘앎 가까이’이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태어난 숨빛으로 이미 ‘앎(알)’이고, 어머니 뱃속에서도 벌써 ‘앎(알)’이었으나 ‘삶(살다)’을 새롭게 맛보면서 배우려고 ‘이미 아는 빛’을 다 내려놓고서 처음부터 걸음마부터 다시 뗀다. 그러니 아기는 넘어지고 울고 다시 일어나면서 걸음마부터 익히는데, 이에 앞서 목을 가누고 뒤집기를 하고 일어서기를 한다만, 아무튼 아기는 새얼(새알)이 되려는 몸짓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앎(알)’이 아닌 ‘아는 척·아는 듯’에 머문다면 여러모로 힘들거나 어렵거나 까다로운 나머지 두 손을 들고서 벌러덩하고프기 쉽다. 아직 알지 않을 적에는 쉽게 불타오르거나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고. 그렇지만 비로소 철이 드는 어른으로서 ‘어짊·슬기·철’ 세 가지를 고루 갖추어 ‘사랑·빛·숨’으로 거듭나면, 마음에 씨앗을 품는다. 이때 비로소 ‘마음’이 아닌 ‘마음씨’로 바뀐다. 우리는 저마다 ‘마음씨(마음씨앗)로 바뀐 다음’부터 ‘앎을 새로 맞아들이고 바라보는 하루’를 누려서, 이때부터는 힘든 일이 없다. 아직 알지 않을 뿐이기에 힘들 뿐이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이렇게 아는구나’ 하고 깨달으면, 환하게 웃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나날이 난날이니 참말로 난날이란 따로 없다. 깨어나는 날이고, 일어나는 날이고, 살아나는 날이고, 피어나는 날이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