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피소의 문학 - 구조 요청의 동역학 카이로스총서 55
김대성 지음 / 갈무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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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숲노래 문학읽기 2023.4.1.

인문책시렁 302


《대피소의 문학》

 김대성

 갈무리

 2018.12.31.



  《대피소의 문학》(김대성, 갈무리, 2018)을 곰곰이 읽었습니다. 저는 ‘대피소’ 같은 한자말을 안 쓰지만, 이 말이 무엇을 가리키거나 뜻하는지는 헤아립니다. 우리 아이들하고 살아가며 이 말을 쓸 일은 없되, 아이들하고 함께 읽는 책이나 같이 다니는 곳에 문득 이 낱말이 나오면 풀어내 줄 테니까요. 아이들이 이 말을 쓸 일이 없더라도, 책이나 길에서 얼핏 보고서 무엇인지 알도록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어요.


  한자말 ‘대피’는 ‘달아남·내뺌’이나 ‘비낌·떠남·감·등짐’을 나타냅니다. ‘대피 + 소’ 얼개로 바뀌면 ‘돌봄터·쉼터’로 바뀌지요. 앞뒤에 붙는 말씨에 따라 쓰임새가 바뀌곤 합니다.


  마흔 살이 넘도록 그냥그냥 ‘문학’이란 한자말을 썼으나, 이제는 ‘글’이라고만 하거나 ‘글꽃’이라고도 합니다. 한자말 ‘문학’을 일본사람이 총칼을 앞세워 이 나라를 집어삼키고서 훅 퍼뜨렸기 때문에 안 쓰지 않습니다. 열아홉 살을 넘어서던 무렵에는 ‘국어’ 아닌 ‘말·우리말·한말’을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스물다섯 살을 넘어서던 즈음에는 ‘사회’ 아닌 ‘터·마을·삶터·집·나라’를 쓰자고 생각했고, 서른 살을 넘어서던 때에는 ‘학교’ 아닌 ‘배움터·집’을 쓰자고 생각했고, 서른다섯 살을 넘어서던 때에는 ‘정치·경제’ 아닌 ‘벼슬·다스림·길’하고 ‘살림·돈’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마흔 살 무렵에 ‘문화’ 아닌 ‘삶·꽃·살림·지음·오늘·집밥옷·길·밭·바탕·멋·놀이’를 쓰자고 생각했고, 마흔다섯 언저리에 비로소 ‘문학’을 내려놓고서 ‘글·꽃·글꽃·이야기·노래·수다’를 쓰기로 생각했습니다.


  말 한 마디를 새로 품을 적마다 스스로 피어나게 마련입니다. 다만, 이 말을 품기에 아름답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저 말을 움켜쥐거나 붙잡는대서 못나거나 볼꼴사납지 않습니다. 이 말을 품는 사이에 스스로 피어나는 삶이 있고, 저 말을 틀어쥐는 동안 스스로 죽어가는 빛이 있을 뿐입니다.


  말이란 마음입니다. 마음이란 삶입니다. 삶이란 살림이고, 살림이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넋이고, 넋이란 숨결이요, 숨결이란 빛인데, 빛이란 씨앗이고, 씨앗이란 꿈이면서, 꿈이란 밤이지요. 밤은 어느새 밤으로 갑니다. 이리하여 ‘말’을 받은 ‘밤’은 처음부터 새삼스레 꿈을 거치고 씨앗을 지나고 빛을 지나 새록새록 마음에까지 이르러요.


  우리는 밤이라는 곳에 고요히 있다가 문득 눈을 뜨면서 말을 터뜨립니다. 한달음에 ‘밤 → 말’로 나아간다고 여겨도 되지만, 이 한달음 사이에 거치거나 디디는 숱한 길을 차근차근 짚어도 됩니다. 눈을 뜨기에 나랑 너를 나누고, 나랑 너 사이에 흐르는 바람을 알아보며, 나랑 너가 우리이면서 남인 줄 깨닫습니다. 하나가 둘로 갈리면서 하늘이 열리고, 열린 하늘은 둘이자 여럿이자 모두이면서 울타리처럼 하나이기도 하기에 ‘한울’이요 ‘우리’인 줄 느낄 만합니다.


  “쉬는 글꽃(대피소의 문학)”이란 몸도 마음도 쉬는 글길이자, 바람을 마쉬는(들이쉬고 내쉬는) 글빛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글님은 부산 글판이며 서울 글판에서 맞닥뜨린 터무니없거나 얼척없거나 뜬금없는 일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새롭게 글씨앗으로 여미어 내놓았습니다. 엉터리스러운 짓을 일으킨 분들은 ‘나쁘지 않’되 ‘낫지 않’기도 합니다. 그저 그분들은 그분들 삶을 걸어가면서 그런 짓을 스스로 일으켜서 겪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나무랄 일도 다그칠 까닭도 탓할 이야기도 없어요. 그냥그냥 그분을 물끄러미 보면서 우리 스스로 새삼스레 여밀 오늘 이 글사랑을 헤아리고서 품으면 넉넉합니다.


  이름을 내세우려고 쓰는 글은 가엾습니다. 힘을 앞세우면서 내거는 빛꽃(사진)은 창피합니다. 돈을 벌어들이며 내놓는 그림은 불쌍합니다. 다만, 이렇게 느낄 뿐입니다. 그분들은 이름이랑 힘이랑 돈을 거머쥐면서 해낙낙하니까 그 길을 갈 뿐이에요. 우리는 이름·힘·돈이 아닌 삶·살림·사랑을 바라보기에, 시골에서도 서울(도시)에서도 숲빛으로 마음을 다독이면서 이곳에 아이들하고 도란도란 어깨동무를 하면서 놀이를 하고 노래를 할 뿐입니다.


  삶·살림·사랑에는 숨이 흐릅니다만, 이름·힘·돈으로는 숨막힙니다. 글판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이 이름·힘·돈을 털어내고서 홀몸으로 가벼이 서면서 아이들 곁에서 수다꽃을 피우실 수 있다면, 우리나라 글꽃에서 술판이나 노닥판은 저절로 사라질 테고, 그 나물에 그 밥인 끼리질(커넥션)이며 돌라먹기는 눈녹듯 사그라들리라 봅니다.


ㅅㄴㄹ


중요한 것은 텅 빈 이곳을 무언가로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놓쳐버린 끈을 다시 그러잡는 것이며 닫힌 문을 두드려 막힌 통로를 뚫어내 안팎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67쪽)


신경숙 사태가 2000년대 초반의 문학 권력 논쟁의 반복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건 신경숙과 대형 문학 출판사의 공모만이 아니다.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까지 독점적인 방식으로 반복될 때 비평은 정체되고 고립될 수밖에 없다. (116쪽)


‘선배’ 편집위원들이 대개가 어느 대학의 교수인 상황에서 젊은 비평가들 또한 대부분이 대학원 출신이어서 이들의 문단 활동이나 편집회의 참여는 단순히 글을 기고하거나 잡지를 만드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생계와 직결된 경우가 많다 … 대학 강의가 문서상으론 초빙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는 정규직 교수가 ‘나눠주는 것’으로 관습화되어 있듯이 편집위원이라는 직책 또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잠시 ‘할당’되는 것에 가깝다. (119, 120쪽)


오늘날의 한국 문학장은 하나의 성城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지만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는 기이한 성 … 힘들게 시민권을 배당받아 성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성 밖으로 나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안은 실체 없는 ‘대의’로 넘쳐나고 혼자의 몸으로 그러한 ‘대의’를 거스르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성안의 대의’는 스스로 ‘서는 것’을 스스로 ‘걷는 것’을, 스스로 ‘쓰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135, 139쪽)


‘문학의 곳간’을 연다는 것은 저마다의 생활 속에서 문학과 접속할 수 있는 다른 면들을 발명하고 실험한다는 것이다. (228쪽)


몰개성적인 케이블카는 대도시 사람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그곳의 풍광을 마음놓고 감상하는 데 최적화된 관광 상품이다. (266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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