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꽃


‘가정주부’가 아닙니다

말꽃삶 2 살림꽃



  저는 집안일을 신나게 맡습니다. 어버이 품을 떠난 스무 살부터 모든 살림을 혼자 했습니다. 그때가 1995년이니 혼살림 자취가 제법 길다고 할 만합니다. 1995년부터 혼살림을 하는데, 이해 가을에 싸움터(군대)에 끌려가요. 사내란 몸이니 끌려갈밖에 없습니다. 요새는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1994년에 경기도 수원에 있는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을 적에 여러 소리를 들었어요. “자네는 왜 의사 진단서를 안 떼어오나? ○○만 원만 들이면 진단서 하나 쉽게 떼는데, 진단서가 있으면 바로 면제인데, 왜 안 떼어오지? 내가 자네를 재검대상자로 분류할 테니까 떼오겠나?” 하고 묻더군요.


  1994년 봄에 ‘장병 신체검사를 맡은 군의관’이 들려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군의관이 척 보아도 면제 대상자이면, 그냥 면제를 매기면 되는데, 왜 목돈을 들여서 진단서를 떼오라고 하는지’ 알 길이 없더군요. 이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니 우리 어머니 말씀이 “얘야, 거기서 그렇게 말했으면 어머니한테 말하지! 왜 재검을 안 받고 그냥 현역으로 가니! 그 돈이 얼마나 크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눈하고 코가 매우 나빠서, 이 두 가지로 ‘현역 대상 불가’였습니다만, 진단서가 없기에 그냥 스물여섯 달을 강원도 양구 멧골짝에서 싸울아비(군인)로 보냈습니다. 먼 뒷날, 나이가 마흔 살이 훌쩍 넘어간 어느 날 이때 일을 되새기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아하, 그때 그 군의관은, 저(군의관 본인)한테 진단서 돈을 그자리에서 내주거나 계좌이체를 해주면 바로 진단서를 떼어줄 테니, 쉽게(편하게) 면제를 받으라는 뜻이었구나” 싶더군요.


[표준국어대사전]

가정주부(家庭主婦) :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 = 주부

주부(主婦) :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 ≒ 가정주부

안주인(-主人) : 집안의 여자 주인 ≒ 주인댁


  낱말책을 보면 ‘안주인’이라 나오는데, 이런 말은 없습니다. 다 일본스런 말씨입니다. 일본에서는 가시버시(부부)를 이룬 두 짝을 ‘주인·내자’로 가리킵니다. ‘주인 = 사내’요, ‘내자 = 가시내’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

내자(內子) : 1. 남 앞에서 자기의 아내를 이르는 말 2. 옛날 중국에서, 경대부의 정실(正室)을 이르던 말

집사람 : 남에 대하여 자기 아내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 ≒ 집

아내 :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 ≒ 규실·내권·처·처실

안사람 :‘아내’를 예사롭게 또는 낮추어 이르는 말


  일본스런 한자말 ‘내자(內子)’는 ‘가시내·순이’를 가리킵니다. 이 일본스런 한자말을 풀면 ‘내 + 자 = 집 +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낱말책에 실린 ‘집사람’은 일본스런 한자말 ‘내자’를 그냥 풀어낸 “무늬만 우리말”입니다.


  ‘아내’도 “무늬만 우리말”이에요. ‘안해(아내) = 안 + 애”요, ‘안사람’이란 소리인데, ‘집사람·내자’하고 똑같은 말입니다.


  무늬가 한글이라서 우리말일 수 없습니다. ‘집사람·안사람·아내’는 그냥 일본말입니다. 일본에서 가시내·순이를 “집에서만 머물며 집일을 도맡고 사내를 섬겨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가리키는 뜻입니다. 퍽 묵은 책에 ‘안해(아내)’란 글이 있기도 하다지만, ‘가시내·순이는 집안에만 머물 사람’일 수 없습니다. 낡은 틀(가부장권력)로 바라보는 이름은 말끔히 털 노릇이에요.


  참 터무니없는 말씨를 우리 삶터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쓰며 그냥그냥 지나칠 뿐 아니라, 낱말책 뜻풀이마저 엉망입니다. 이러다 보니, 저로서는 이 말씨를 그냥 쓸 수 없어요. 그래도 그럭저럭 써야 하려나 생각하다가 2007년에 이르러 새말을 찾기로 했습니다. 2007년에는 어느 이웃님이 쓰는 ‘옆지기’가 꽤 어울린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옆·곁’이란 비슷한말을 차근차근 뜻풀이를 하면서 ‘옆지기’는 더 쓰고 싶지 않았어요.


[숲노래 낱말책]

곁님 : 곁에서 늘 서로 아끼거나 돌보는 사람을 높이는 이름. 가시버시 사이에서 서로서로 쓸 수 있는 이름. 겨울을 함께 견디며 포근히 새날을 꿈꿀 만한 사이인 사람. 가시밭길도 꽃길도 나란히 걸어가면서 삶을 갈무리하고 기쁘게 펼 이야기를 간직하는 두 사람. (← 배우자, 피앙세, 아내, 안사람, 남편, 부인(夫人), 신부(新婦), 신랑(新郞), 와이프, 동반자, 반려(伴侶), 반려자, 자기(自己), 애인)


  아직 다른 낱말책에는 없는 낱말인 ‘곁님’입니다만, 2011년 즈음 비로소 ‘곁 + 님’ 얼개로 새말을 지어 보았습니다. 왜 ‘곁님’이란 말을 새로 지었느냐 하면, 우리말은 짝을 이룬 둘이나 여러 사람이 서로 부를 적에 ‘순이돌이’를 굳이 안 가릅니다.


  님이면 ‘님’이고, 남이면 ‘남’이고, 수수하면 ‘이’입니다. ‘이이·저이·그이’요, ‘이쪽·저쪽·그쪽’이에요. ‘이분·저분·그분’이나 ‘이님·저님·그님’ 모두 순이돌이 누구한테나 씁니다.


  시골 어르신들은 가시버시 사이에서 으레 ‘이녁’이라고 쓰시더군요. ‘집이’라는 말씨도 쓰시지요. 따로 어느 갈래(성별)를 긋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말답게 서로 짝꿍을 가리키는 이름도 따로 어느 갈래(성별)를 안 그어야 맞겠지요.


  “곁에 둔다”하고 “옆에 둔다”는 다릅니다. 한울타리를 이루면서 한집안을 이루는 사이라면 ‘곁’이요, 부르기 좋도록 두 글씨일 적에 어울릴 테니 ‘곁 + 님’으로 지었어요.


  굳이 ‘-님’을 붙였는데, 부름말로도 서로 높이고 스스로 높일 줄 아는 마음일 적에 시나브로 사랑으로 가리라 여겼습니다.


곁님. 곁씨


  때로는 ‘곁씨’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서는 또래나 손아랫사람을 높일 적에 ‘씨’를 붙여요. 어린이나 푸름이(청소년)를 높이려는 말씨로 ‘어린씨·푸른씨’처럼 쓸 만합니다. 어린이는 어른을 보며 ‘어른씨’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얼개를 헤아리면 ‘곁씨’라 해도 어울려요.


  그러면 왜 ‘살림꽃’인가를 말할 때로군요. 앞서 집안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한자말 이름 ‘가정주부·주부’를 들었는데, 낱말책 뜻풀이가 좀 웃기지 않나요? 아니, ‘가정주부·주부’라는 한자말부터 너무 낡지 않나요?


  이런 이름을 왜 그대로 써야 할까요? 집안일은 순이만 맡아야 할 일이 아닙니다. 돌이도 함께 해야지요. 아니, 가시버시를 이루는 순이돌이가 서로 즐겁게 사랑으로 오순도순 누리면서 일굴 집안일이요 집살림입니다. 토막을 치듯 갈라서 할 일이 아닌, 기쁘게 오롯이 맡을 일입니다.


살림꽃 ← 1. 전업주부, 가정주부, 주부, 가사노동자, 관리자

살림꽃 ← 2. 주인(主人/주인장), 능력자, 언성 히어로, 베테랑, 백전노장

살림꽃 ← 3. 문화(문화적), 문화생활, 문화예술, 문명(文明/문명적), 대중문화, 일반문화, 인문(인문적·인문학·인문학적·인문지식)

살림꽃 ← 4. 실학(實學/실학자·실학사상), 노작(勞作), 노작교육, 생활의 지혜, 인생철학, 철학, 교양(敎養), 지식(知識), 지혜

살림꽃 ← 5. 워라벨(워킹 라이프 밸런스), 행복한 생활, 문화행정, 문화재, 문화유산, 전통문화, 전래문화, 전승문화, 고유문화, 유산(遺産), 미풍(美風), 미풍양속(美風良俗), 취미(취미생활)

살림꽃 ← 6. 일화(逸話), 평전, 길흉, 길흉화복, 경영, 경영 마인드, 경영정신, 인간의 가치, 가치, 인격, 인격체, 인권, 권리, 품위, 도리(道理)

살림꽃 ← 7. 발전(발전적), 성장, 발달, 번영(번영기), 번성(번성기), 번화(번화가), 번창, 융성, 향상, 팽창, 개화(開化), 일취월장, 진화(進化), 변화(변화무쌍), 변하다


  처음에는 수수하게 ‘살림꾼’이라 쓰는데, ‘-꾼’으로 맺는 우리말을 낮춤말로 여기는 분이 매우 많더군요. 그래서 ‘살림님’이나 ‘살림돌이·살림순이’로 슬쩍 말끝을 바꾸었더니 좋다고 하는 분이 많아요. 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말끝을 새로 붙여 ‘살림꽃’하고 ‘살림빛’을 써 봤지요.


  이처럼 ‘살림꽃·살림빛’이란 두 가지 우리말을 짓고 보니, 이 말씨로 담아낼 만한 여러 길이 확 트여요. 집에서 즐거이 일하는 순이돌이를 가리키는 밑뜻을 바탕으로 ‘베테랑’이나 ‘실학’이나 ‘문화생활’이나 ‘워라벨’이나 ‘인권’이나 ‘발전’까지도 ‘살림꽃’ 같은 수수한 우리말에 담으면 어떨까요? 즐겁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꽃이거든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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