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10.15.

수다꽃, 내멋대로 28 우리 아이가 읽을



나는 글을 1992년부터 비로소 썼다. 그때 고작 열여덟 살이던 푸름이로서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 “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우리 아이가 읽을 수 있는 글만 쓰자.” 나는 어린배움터를 다닐 적이든, 푸른배움터를 다닐 때이든, 짝꿍(여자친구)이 없었다. 동무들은 내 말을 듣고서 “야, 넌 여친도 없는 주제에 무슨 네 아이가 읽을 글을 생각해?” 하면서 웃더라. “너희가 보기에도 내가 짝을 만날 수 없을 만할 텐데, 내가 짝을 못 맺고 아이를 못 낳더라도, 이웃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글을 쓸 생각이야.” 언제나 모든 몸짓을 “우리 아이가 본다면?” 하고 생각하면서 했다. 때때로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몸짓을 한 날은 “우리 아이한테 무어라 말하지?” 하면서 혼자 낯을 붉혔다. 이때에도 난 짝꿍이 없이 혼자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일했고, 한때 짝꿍을 사귀었다가 헤어지고 혼자 책집마실을 다니면서도 “우리 아이가 곁에서 지켜볼 테니까” 하고 생각했다. 어느덧 두 아이를 낳아 시골집에서 고즈넉이 살아가는데, 혼자 시골집을 떠나 서울(도시)로 바깥일을 하러 며칠씩 돌아다닐 적에도 늘 “우리 아이들하고 함께 일하러 돌아다닌다면” 하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가 곁에서 마음으로 지켜보네!” 하고 생각하면,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 의젓하고 씩씩한 어버이로서 한 걸음씩 디딜 수 있다. 나는 사람을 겉모습으로 볼 마음이 터럭만큼도 없다. 겉모습은 껍데기이잖은가? 아무리 이쁘장해도, 아무리 날씬하거나 잘나 보여도, 아무리 대단하고 비싸다는 부릉이를 몰아도, 한낱 겉모습에 껍데기일 뿐이다. 나는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 때문에’ 주무르기(지압·마사지)를 스스로 익혔다. 우리 아버지는 어린배움터 길잡이(국민학교 교사)로 일했고, 날마다 술로 떡이 된 채 한밤에 들어왔는데, 날마다 마룻바닥에 털썩 엎어져서 “야, 신 벗기고 주물러.” 하면서 언니랑 나를 불렀다. 우리 둘은 거나쟁이 신을 벗기고 한 시간 남짓 발가락부터 머리까지 온힘을 다해 주물렀다. 이러기를 열 해 즈음 하다 보니 저절로 주무르기를 익힐 수밖에. 겉으로 아무리 잘나 보이는 사람도 얼핏 보기만 해도 몸 어느 곳이 막혀서 손가락으로 콕 찔러서 눌러 주어야 하는지 마음으로 보인다. ‘눌러 줄 곳이 안 보이는 사람’은 여태 다섯 사람쯤 보았을까. 나는 내 일감(본업)인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는 길도, 우리나라 ‘말살림(언어문화)’을 살리려는 대단한 뜻이 아닌, 내가 낳아서 돌볼 아이에다가 이웃 아이들이 앞으로 우리 말글을 헤아리고 배울 적에 이바지할 책으로 징검다리를 삼으려는 뜻 하나로 썼고 쓴다. 내가 쓰는 우리말 이야기가 아닌, ‘책숲마실 글’이나 여러 가지 삶글(수필)이나 느낌글(비평·서평)이란, 알고 보면, ‘낱말책(사전) 보기글’로 스스로 삼으려고 쓰는 글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내가 읽는 숱한 책도 ‘아이들한테 읽으라고 건넬 만한가 아닌가’라는 잣대가 가장 크다. 줄거리가 알차도 글결이 엉터리인데다가 우리말결을 망가뜨리는 책은 차마 아이들 손에 쥐어 주고 싶지 않다. 그림책이라면 엉터리로 쓴 글을 몽땅 죽죽 그어 고쳐쓴 다음에 건네준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두고두고 물려받아 삶을 노래할 만한 숲집을 가꾸고서 남길 생각이다. 나는 온누리 모든 아이들이 기쁘게 물려받을 숲과 보금자리인 푸른별(지구)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든 말글에 담아서 하루를 여민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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