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생각이 깃든 (2021.4.25.)

― 진주 〈동훈서점〉



  공주하고 대전을 들러 포항에서 머물다가 구미로 건너가서 진주로 옵니다. 나흘밤을 바깥에서 보냈습니다. 오늘은 고흥으로 돌아가야지요. 여러 고장을 잇달아 돌면 길삯을 조금 줄일는지 모르나 등짐에 책이 쌓입니다. 책집을 찾아 나그네처럼 다니니 큰고장에 깃듭니다. 우리 시골집 봄꽃은 얼마나 흐드러졌을까 궁금하고, 숲빛을 품은 별빛이 그립습니다.


  고흥에서는 어디로 가든 길이 멀 뿐 아니라, 바로가는 길이 드뭅니다. 순천이나 광주를 거치든, 서울을 찍고 가든, 돌고돌기는 매한가지라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이다음에는 조금만 돌아다녀야겠어요. 이틀이나 사흘을 밖에서 묵으면 먼저 고흥으로 돌아가서 숲바람하고 햇볕을 쬐고 샘물을 마시며 몸마음을 달래야겠어요.


  아무튼 진주 〈동훈서점〉에 와서 다리를 쉬고 숨을 돌립니다. 골마루를 거닐면서 눈길을 추스르고, 책시렁을 쓰다듬으면서 손길을 다독입니다. 무슨 일이건 미룰 까닭이 없되 서둘러 끝낼 수 없습니다. 여름을 앞두고 마치거나 겨울을 앞두고 마무리를 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철이 다 다르게 흐르는 하루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일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삐걱거리거나 힘들거나 다칩니다.


  어깨힘을 빼야 일을 풀어냅니다. 어깨힘이 없어야 글을 풀어요. 멋은 오래가지 않아요. 사랑으로 가꾸는 살림이 오래갑니다. 그동안 책집마실을 하며 책시렁 곁에서 스칠 적마다 눈에 들어온 김남주 글모음을 새삼스레 만지작하면서 몇 꼭지를 되읽습니다. 두고두고 손자국이 남은 옛책을 들여다보다가, 어느덧 새책집에서는 사라진 헌책을 바라보다가, 갓 나와 널리 읽히는 책을 힐끗 봅니다.


  어느 책을 품고서 돌아갈까 하고 살피는데, 갓 나와 널리 읽히는 책에는 마음이 안 갑니다. ‘갓 나와 널리 읽히는 책’이 참말로 읽힐 만하다면, 앞으로 서른 해 뒤에도 사람들이 읽어 주겠지요. 서른 해나 쉰 해 뒤에도 오늘날 날개책(베스트셀러)이 날개책이려나 하고 어림하면 어느 책도 날개책조차 아니고, 다 버림받을 텐데 싶어요. “그러면 네가 남기는 글은 서른 해나 쉰 해 뒤에 너부터 네 마음을 울리는 글로 이어갈 수 있니?” 하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습니다. 오늘 제가 손에 쥐는 책을 서른 해나 쉰 해 뒤에 태어나서 자랄 아이들 손에 이어줄 만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세로쓰기라서, 한자말이 많아서, 한자를 대놓고 적어서, 또 영어를 마구 섞어써서, 옮김말씨(번역체)가 가득해서, 이래저래 앞으로는 못 읽힐 책이 수두룩하겠다고 느껴요. 알고 보면, 북적북적 어울리는 듯해 보이는 사람들도 늘 혼자입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스스로 살아갑니다. 책도 늘 스스로 살아숨쉽니다.


ㅅㄴㄹ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었네》(H.뵐/김창활 옮김, 삼중당, 1984.9.15.)

《Ich lerne Deutsch 2》(이시진, 실학사, 1968.1.)

《현대의 神》(N.쿠치키 엮음/진철승 옮김, 범우사, 1987.9.15.)

《빛을 남긴 韓國의 女人像, 永遠한 삶을 찾아 : 金一葉》(한운사, 명서원, 1976.11.5.)

《빨치산》(이영식, 행림출판,1988.8.20.)

《三賢 19집》(편집부, 삼현여자고등학교, 1992.2.13.)

《朴正熙大統領演說文選集, 平和統一の大道》(박정희, 대통령비서실, 1976.3.1.)

《國民讀本》(박관수 엮음, 공산권문제연구소, 1973.7.20.)

《거울 속의 거울》(미하엘 엔데/신동백 옮김, 기린원, 1990.7.10.)

《히로시마 노트》(오에 겐자부로/김춘미 옮김, 고려원, 1995.8.20.)

《기도하는 나무》(김수복, 종로서적, 1989.3.28.)

《鄭道傳 思想의 硏究》(한영우, 한국문화연구소, 1973.11.30.)

《열일곱 살의 쿠테타》(송정연, 황기성사단, 1991.1.10.)

《대변혁》(앨빈 토플러/안정효 옮김, 고려원, 1984.4.15.)

《백팔번뇌》(松濤弘道/현대훈 옮김, 일월서각, 1979.5.1.)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이 글은 2021년 4월 이야기입니다.

2022년 10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갈무리합니다.

이 글에 붙이는 사진은 2021년 4월 모습이기에

2022년 10월에는 새터에서 사뭇 다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