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수다꽃, 내멋대로 22 부채
싱싱칸(냉장고)를 쓴 지 얼마 안 된다. 작은아이가 두돌맞이 즈음일 무렵 비로소 들였다. 싱싱칸 없이 어찌 사느냐고 묻는 분이 많지만, 이 나라 사람들이 싱싱칸을 쓴 지는 기껏해야 쉰 해가 채 안 된다(2022년으로 보면). 다들 싱싱칸 없이 밥을 잘 해먹었고, 밥찌꺼기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싱싱칸이 집집마다 퍼지면서 외려 밥을 제대로 못 해먹는다고 느낀다. 싱싱칸을 안 쓰는 집이 없다시피 하면서 밥찌꺼기에 밥쓰레기가 흘러넘친다고 느낀다. 보라. 큼지막한 싱싱칸을 하나조차 아닌 둘이나 셋까지 들여놓은 집이 수두룩한데, 그 집에서 아무런 밥찌꺼기나 밥쓰레기가 안 나오는가? 알뜰히 밥살림을 하는가? 싱싱칸을 두었으니 비닐을 안 쓰나? 외려 싱싱칸을 쓰면 쓸수록 비닐쓰레기조차 더 늘지 않는가? 싱싱칸을 집에 들이기는 했으나 바람이(선풍기) 없이 살았다. 가시어머니가 우리 시골집으로 놀러오시면서 “선풍기도 없이 어떻게 살아? 난 더워.” 하면서 장만하셨다. 가시어머니가 우리 시골집으로 나들이하시면 헛간에서 바람이를 꺼냈고, 우리 스스로 바람이를 쓸 일은 없다시피 했다. 나한테는 부채가 있으니까. 우리 집에는 부채가 많다. 두 아이를 돌보며 두 손으로 부채를 하나씩 쥐고서 한나절을 거뜬히 부쳐 주었다. 한여름밤에는 두 아이 사이에 서서 두 손으로 가벼이 팔랑팔랑 부채질을 하면서 자장노래를 불렀다. 한 시간도 두 시간도 아닌 너덧 시간을 부채질을 하자면 안 힘드느냐고 묻는 분이 많은데, “아이를 돌보면서 어떻게 힘들다고 생각해요? 아이한테 힘들다는 몸짓이나 마음을 물려주거나 가르치고 싶으셔요?” 하고 되물었다. 아이들한테 부채질을 해주면서 노래를 부르고 웃고 춤추었다. 왜? 즐거운 살림꽃이니까. 어머니라면 아기한테 젖을 물릴 테고, 아버지라면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 곁에서 가볍게 부채질을 할 노릇이다. 부채질을 하는 아버지는 ‘아기 어머니’가 배고플 즈음 맞추어 밥을 지어서 차려놓는다. 부채질을 하는 아버지는 아기가 똥오줌을 누면 기저귀를 갈고서 기저귀빨래를 한다. 아기가 똥을 눈 때에는 물을 끓여서 알맞게 추스른 다음 씻긴다. 여름철에는 날마다 대여섯 벌씩 씻기고 빨래를 했다. 아니, 여름철에는 한 시간마다 빨래를 했으니, 날마다 스물넉 벌씩 빨래를 했다. 이렇게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이웃은 “밤에 왜 안 자고 빨래를 해요?” 하고 묻는다. “아기가 밤이라 해서 똥오줌을 안 누나요? 자면서 똥오줌을 누는 아기는 잠이 안 깨도록 살살 다독이면서 기저귀를 갈고 씻겨 주지요.”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노래하고 부채질하고, 이러면서 저잣마실을 하고, 낱말책(사전)을 쓰는 일을 하고, 이래저래 갖은 일을 즐거이 맡았다. 큰아이가 기저귀를 뗄 즈음 작은아이가 태어났기에, 작은아이가 기저귀를 떼는 날까지 하루에 30분 넘게 느긋이 잠자리에 든 일이 없다. 늘 15∼20분 사이로 눈만 붙이는 쪽잠살림이었는데, 낮에는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골짜기나 바다나 숲으로 마실을 다녔다. 부채질을 하는 어버이는 언제나 온몸으로 아이들을 품고 사랑하며 걷고 자전거를 달렸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