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노래하는 돌 (2021.10.17.)

― 제주 〈그리고서점〉



  푸른배움터(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곧잘 노래(시)를 외웠습니다. 말끝 하나 토씨 하나 안 틀리도록 외워서 읊으면 마치 스스로 이 노래를 짓는 마음이나 눈길로 나아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노래를 외우면 외울수록 ‘제 노래’를 쓸 수 없더군요. 잔뜩 외운 다른 노래가 마음에 떠돌면서 제가 스스로 그려서 짓고 누리는 오늘 이야기를 노래로 담기 어려웠습니다.


  열린배움터(대학교)에 들어가고 보니, 누가 누구를 가르칠 수 없구나 싶을 뿐 아니라, 배우려는 사람은 스스로 배울 뿐이더군요. 모든 배움터는 마침종이(졸업장)·솜씨종이(자격증)를 내줄 뿐입니다. 종이 한 자락은 어떤 길도 빛도 숨결도 사랑도 뜻도 살림도 밝힐 수 없어요.


  이제 어디서 잃었는데, 1995년 4월부터 스스로 노래를 지었습니다.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일하는 오늘을 그저 그대로 적어 보았어요. 새벽마다 겪는 삶을 적고, 새뜸값(신문대금)을 걷으러 다니는 나날을 적고, 살림돈이 없어 외상을 지고 라면 한 자락을 얻어먹는 살림을 적고,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자전거로 골목을 누비면서 새뜸을 돌린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새뜸나름이로 일하는 사람이 제법 있을 텐데, 막상 이 삶자락을 글로 남긴 사람은 안 보였어요.


  제주 애월읍에 ‘노래돌(시비)’이 꽤 많다고 합니다. 그 고을에서 고을돈으로 노래돌을 척척 찍어서 세운 듯한데, 애월 어린이하고 마을길을 거닐면서 노래돌을 둘러보는데 틀린글씨가 끔찍하도록 많습니다. 어쩜 이럴까요?


  애월에 줄줄이 선 노래돌 가운데 제주 이야기를 담은 노래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름난 노래꾼(시인) 글을 옮길 뿐이요, 제주다운 숨결이나 수수한 사람들이 사랑으로 지은 살림빛을 담아낸 글은 아예 없어요.


  노래는 우리가 스스로 지은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흐르면서 즐겁게 쓰거나 짓거나 엮습니다. 잘 써야 하지 않고, 잘나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서점〉 지기님이 꾀하는 “어린이랑 노래돌걷기(시비 트레킹)”를 하며 생각합니다. 제주 어린이 누구나 스스로 꿈이랑 사랑을 오롯이 글로 옮겨서 조그맣게 곳곳에 놓을 수 있다면, 참답게 빛나는 노래잔치를 이룰 만합니다.


  바다를 그릴 줄 알면, 바다를 읽을 수 있으면, 바다하고 한마음으로 노래하리라 느껴요. 하늘을 그리는 눈이면, 하날을 담을 수 있으면, 하늘하고 한넋으로 노래할 테고요. 멋을 부리면 글도 밥도 옷도 집도 아닙니다. 사랑을 담는 살림으로 살아가는 마음이기에 글이요 밥이요 옷이요 집입니다.


ㅅㄴㄹ


《제주 북쪽》(현택훈 글, 21세기북스, 2021.8.10.)

《열두 살 해녀》(김신숙 글·박둘 그림, 한그루, 2020.8.27.)

《서른 살 청춘표류》(김달국·김동현 글, 더블:엔, 2021.9.1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