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6.21.

아무튼, 내멋대로 12 오리궁둥이



  어린이로 살던 무렵, 힘든 여럿 가운데 하나는 바지였다. 나는 돌이(남자)란 몸으로 태어났는데 ‘돌이바지’를 입기 힘들었다. 둘레 어른들은 “오리궁둥이네. 톡 튀어나온 궁둥이가 귀엽네.” 하고 말했고, 어린배움터(국민학교)에 들어가니 ‘오리궁둥이’를 놀리는 순이(여자)가 참 많았다. 오리궁둥이인 터라 여느 돌이바지를 꿰자면 ‘엉덩이가 안 끼는 치수인 바지’라면 허리가 너무 헐렁해서 흘러내리고, 허리가 맞는 바지라면 엉덩이가 꽉 끼어 쉽게 튿어졌다. 엉덩이가 꽉 끼어 튿어지면 얼마나 창피한지. 튿어진 바지 엉덩이를 툭하면 기우던 어머니는 늘 한숨을 쉬며 “또 튿어지니? 어떡하니? 그렇다고 엉덩이에 맞는 바지는 허리가 너무 헐렁하고.” 하셨는데, 어느 날 엉덩이가 잘 맞고 허리가 안 흘러내릴 만한 바지를 내미셨다. 진작 이런 바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신나서 걱정없이 뛰놀았다. 그런데 이날 배움터(학교)에 가니 순이들이 깔깔대며 놀린다. “어머! 뭐야! 너 왜 여자바지를 입었어! 깔깔깔!” 어머니는 한참 골머리를 앓으시다가 마을 이웃집에서 ‘다 큰 순이가 못 입는 작은바지’를 얻어오셨더라. 비록 놀림을 받으며 얼굴이 벌개지기 일쑤였어도 ‘돌이바지’는 이제 더 안 입겠다고 다짐했다. 놀림질이란 그냥 한동안 손가락질을 하고 깔깔대다가 끝이지만, 엉덩이가 꽉 끼는 돌이바지로 뛰거나 달리자면 자칫 또 튿어질까 봐 걱정해야 하니, ‘놀림받으며 순이바지를 입기’로 했다. 돌이 몸으로 태어나도 오리궁둥이인 사람이 이따금 있다. 오리궁둥이인 돌이는 모두 바지 탓에 호된 어린날을 보냈겠지. 2022년 6월 20일 낮, 서울 어느 옷집에서 깡동바지(반바지)를 고르는데 옷집 일꾼 네 사람이 갈마들면서 “여긴 여자바지예요! 남자바지는 저쪽이에요!” 하고 큰소리를 낸다. “전 오리궁둥이입니다. 남자바지 못 입습니다.” 하고 말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곁짝한테 사줄 바지’를 고를 수도 있고, ‘딸아이한테 사줄 바지’를 살필 수도 있잖은가? 왜 멀쩡한 사람을 마치 ‘미친놈’이나 ‘치한’으로 여기면서 ‘순이바지’를 만지작거리지 말라며 뱀눈을 치켜뜰까? 순이(여자)도 돌이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순이가 치마를 훌훌 벗어던지고서 바지를 꿸 수 있는 삶(권리)을 누린 지 얼마나 되었는가? ‘바지순이(바지를 입은 여성)’를 그렇게 괴롭히고 손가락질하던 ‘미친 사내나라(가부장국가)’를 호되게 겪지 않았는가? 순이옷하고 돌이옷을 가를 까닭이 있을까? 저마다 몸에 맞는 옷을 살필 뿐이요, 저마다 즐길 옷을 누리면 아름다울 뿐이다. 순이가 바지를 마음껏 입는 삶을 누리듯, 돌이도 치마를 신나게 입는 삶을 누릴 때에, 비로소 이 나라는 아름빛으로 가득하면서 사랑으로 어깨동무하는 조그마한 길에 살짝 발을 내딛는 셈이리라 본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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