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배움빛 2022.2.27.

숲집놀이터 264. 한때



철이 되면 김치를 담그느냐고 묻는 분이 많았다. 이렇게 묻는 분은, 사내인 내가 아닌 가시내인 곁님이 김치를 담갔느냐고 묻는 말이더라. 그런데 우리 집은 처음부터 언제나 사내인 내가 집안일을 도맡았으니 “김치 담갔느냐?” 하고 묻는 말은 나더러 김치를 담갔느냐고 묻는 말일 수밖에 없는데, 이를 뒤늦게 깨닫고는 다시 나한테 김치를 담갔느냐고 묻는데, “저는 어려서부터 김치를 못 먹는 몸입니다.” 하고 대꾸한다. 이런 대꾸조차 ‘묻는 그분한테 진작 여러 해째 똑같이 들려준 말’이다. “그럼 김치를 안 드시나?” “저는 김치를 먹을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곁님하고 아이들은 김치를 먹는 몸이니, 저는 이따금 김치를 해서 먹이지요.” “허허, 김치를 못 먹는데 김치를 한다고?” “그러니까 김치가 왜 궁금하고, 김치를 담그느냐고 왜 물으세요?” 쉰 살 가까이 살아오는 사이에 나한테 ‘김치 담그기’를 묻던 어느 분하고도 더는 만나지 않는다. 만날 까닭이 없지 않을까? 이 나라에서 나고자란 사람이라면 모두 김치를 잘 먹어야 할까? 고춧가루가 이 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앗는데 고춧가루범벅인 김치를 누구나 잘 먹어야 할까? ‘소금에 절인 남새’는 참 오래된 밥살림이지만, ‘배추’가 이 땅에 들어온 지는 아직 즈믄해조차 안 되었다. 즈믄해가 지났어도 이 나라 모든 사람 몸에 배추를 절인 밥살림이 몸에 맞아야 할 까닭이 없다. 아이들은 몽땅 배움터(학교)를 다녀야 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모조리 일터(회사)에 나가야 하지 않는다. 논밭을 가꾸어도 즐겁고, 바다를 돌보아도 아름답고 숲을 품어도 사랑스럽다. 집살림을 도맡으면 얼마나 멋스러우면서 기쁠까. 한때 억지로 김치를 몸에 꾸역꾸역 넣으려 했으나, 이제 이 바보짓을 끝냈다. 먹을 수도 없는 김치를 간조차 안 보고서 제법 먹을 만하게 담가서 아이들한테 열 몇 해를 베풀었으나,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이 스스로 손질하고 절이고 간을 맞추고 양념을 해서 먹도록 이끈다. 못 먹는 김치를 굳이 담그지 말자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 사랑으로 살아갈 뿐이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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