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책은 나무 (2021.7.8.)

― 인천 〈삼성서림〉



  7월 9일에 서울에서 일거리가 있었으나 일거리를 맡긴 분이 말없이 미루어 하루가 비었습니다. 아니, 그 일을 보고서 바깥마실을 하려는 길이었으니 모든 일이 뒤틀렸습니다.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 그분만 보았으니, 저는 저대로 제가 나아갈 길을 바라보기로 합니다. 빠진 하루는 그만큼 여러 마을책집을 넉넉히 찾아다니는 날로 삼고, 미리 일그림을 잡은 대로 오늘은 인천으로 날아가서 〈시와 예술〉에 들르기 앞서 〈삼성서림〉에 들릅니다.


  배다리 〈삼성서림〉으로 들어서니 노랫가락이 그윽합니다. 어느 책집이든 노래나 라디오를 틀어놓는데, 이곳은 더 그윽합니다. 왜 그러한가 했더니 나무로 짠 소리판(전축)을 돌리셨더군요.


  소리판을 살짝 만져 봅니다. 소리판에 손을 대면 노랫가락이 손가락을 타고서 몸으로 찌르르 흐릅니다. 마치 책을 쥘 때 같습니다. 종이로 지은 책을 손에 쥐면, 이 책에 얹은 줄거리가 어떠하든 ‘숲에서 우람하게 자라며 바람을 마시고 해를 그리던 나무’ 숨결이 손가락을 타고서 온몸으로 짜르르 번져요.


  셈틀로 글을 많이 쓰곤 하지만, 굳이 붓을 쥐어 종이에 자주 씁니다. 저는 글판하고 다람쥐(마우스)를 나무살림으로 씁니다. 나무로 짠 글판하고 다람쥐를 매만지면, 어느 숲 어느 골에서 어떻게 하루를 누린 나무였는가 하고 느낄 만합니다.


  아무리 누리책이 나오더라도 애써 종이에 이야기를 담는 뜻이 있어요. 새로 나오는 책도 빛나지만, 오랜 손때가 묻은 책도 빛나요. 새책은 갓 종이로 거듭난 나무라면, 헌책은 일찌감치 종이로 거듭나고서 오래오래 사람 곁에서 함께 푸르게 숨쉬는 나무입니다. 책은 나무입니다. 붓도 종이도 나무입니다. 책집은 서울·큰고장 한복판을 푸른 숨결로 보듬는 숲터입니다.


  새책집은 마을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숲터라면, 헌책집은 마을에 오랜빛을 퍼뜨리는 숲터라고 느낍니다. 모든 책은 저마다 다른 나무가 저마다 다른 숨결로 거듭나면서 우리 곁에서 새삼스레 너울거리는 푸른씨앗이기도 합니다.


  나무를 바라보는 눈으로 책을 마주하기에 누구나 푸르게 피어납니다. 나무를 돌보며 품는 마음으로 책을 장만해서 아끼기에 누구나 푸릇푸릇 자라납니다. 나무를 심듯 책을 곁에 놓기에 보금자리에 푸르게 싹트는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글쓴이나 펴낸곳 이름이 아닌, 나무로 살아온 책을 눈여겨본다면 사뭇 다릅니다. 줄거리가 아닌, 사람이 스스로 사랑한 삶을 차곡차곡 여미어 아이들한테 물려주어 숲하고 새삼스레 어우러지는 길을 밝히는 이야기를 읽으면 언제나 즐겁습니다.


《2분간의 녹색운동》(M.램/김경자·박희경·이추경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1.6.10.)

《찰리 채플린》(이와자끼 이꾸/박필규·최금화 옮김, 분도출판사, 1987.8.25.)

《돌길의 풀꽃》(최형, 산하, 1991.5.15.)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마루야마 겐지/고재운 옮김, 바다출판사, 2014.3.20.)

《당신이 자꾸 뒤돌아보네》(최준렬, 문학의전당, 2020.2.27.)

《기능사를 위한 도장기술》(이우성 엮어 옮김, 대광서림, 1964.6./1974.7.1.)

《‘진보의 새시대’는 오는가》(편집부, 새벽별, 1993.2.13.)

《우리문학의 넓이와 깊이》(김윤식, 서래헌, 1979.11.25.)

《농인, 우리들의 이정표》(이준하·박지영·최정화·김민주, 부크크, 2015.11.11.)

《행복은 그대 속에》(루드비히 마르쿠제/황문수 옮김, 범우사, 1979.11.25.)

《실존들의 모습》(김흥호, 풍만, 1984.10.5.)

《템플 그랜든》(사이 몽고메리/공경희 옮김, 작은길, 2012.9.25.)

《타고르 暝想錄》(타고르/김인환 옮김, 오성출판사, 1980.1.10.)

《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김진경, 푸른나무, 1988.3.20.)

《나는 농부란다》(이윤엽, 사계절, 2012.7.10.)

《혼자 집을 보았어요》(이진수 글·김우선 그림, 웅진문화, 1991.12.15.)

《Official Guide to Raising Better Rabbits》(편집부, American Rabbit breeders association, 1972)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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