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드리는 (2021.10.1.)

― 진주 〈형설서점〉



  처음 헌책집에 눈을 떴을 무렵인 1992년에는 푸른배움터(고등학교)가 얼마나 끔찍한 사슬터인지 새삼스레 느꼈고, 책숲(도서관)은 얼마나 허접한가 하고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배움수렁(입시지옥)으로 밤 열한 시까지 배움터에 매여야 하는 몸이었지만, 이레마다 이틀씩 이런 핑계 저런 토를 달고서 빠져나와 헌책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다’는 배움터부터 헌책집까지 한숨도 안 쉬고 달려서 갔다는 뜻입니다. 길삯조차 아까워 이십오 분쯤 달렸어요. 반듯한 4킬로미터라면 오래 안 걸리지만, 책이 가득한 짐을 메고서 건널목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달렸으니 이십오 분입니다. 100원이 아쉬웠고 1분이 아까웠어요.


  땀으로 흥건한 몸으로 인천 배다리 헌책집에 닿으면 숨도 안 돌리고 들어가서 한켠에 책짐을 내려놓고서 이 책집이 닫을 때까지 갖은 책을 쉬잖고 읽었습니다. 이마에 돋고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책에 빠졌습니다. 책집지기 아주머니나 할아버지가 “학생, 이제 우리도 집에 갈 때인데?” 하고 부르시면 그제서야 일어나 ‘미처 못 읽은 책’하고 ‘아름답게 읽은 책’을 주섬주섬 챙겨 책값을 셈했습니다. 집까지 두 시간 걸려 걸어가는 동안 거리불에 기대어 책을 마저 읽었어요. 이튿날 새벽에 배움터로 가는 버스길에 또 읽고요.


  오늘날 새로 여는 마을책집은 ‘책으로 쉬는 마을가게’이자 ‘마음을 부드러이 다독이는 책샘터’라고 느낍니다. 책집은 책손한테 샘물 같은 책을 건넵니다. 책손은 책집에 반짝이는 눈빛을 보냅니다. 둘 사이에는 즐겁게 빛나는 숨결이 흘러요.


  책을 고를 적에는 늘 이 책집에서 건사한 손길이 묻은 책을 반가이 맞이합니다. 모든 책집은 저마다 다르게 삶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에 따라 저마다 새롭구나 싶은 책차림입니다. 마을책집 책차림은 책손한테 베푸는 보람이라고 느낍니다. 책손으로서는 이 책시렁을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새록새록 숨빛을 나누어 받습니다. 골마루를 거닐며, 어느 책 앞에서 우뚝 멈추며, 살살 한 쪽씩 넘기며, 글줄 너머에 감도는 이야기를 헤아리며, 또 이 책을 장만할 돈을 주머니로 어림하며, 책집마실은 여러모로 무럭무럭 영급니다.


  진주 헌책집 〈형설서점〉 지기님이 “오시는 손님들마다 이 글(동시)을 보더니 어쩜 우리 책집하고 어울리는 글이 다 있냐고 물으셔. 오늘도 또 주게? 앞으로 전시할 만큼 책꽂이에 잔뜩 붙겠네?” “저는 이곳에서 누린 책빛을 밑싹으로 삼아서 바람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옮길 뿐인걸요. 이다음에 찾아올 적에도 새 노래가 깃들어서 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서로 드리는 사이인 책동무입니다.


ㅅㄴㄹ


《現行朝鮮語法》(鄭國采 글/宮田一志 펴냄, 宮田大光堂, 1926.12.25.)

《增補 內鮮書簡文範》(大山 壽 엮음, 三中堂書店, 1944.2.28.)

《敗戰前後의 獨逸》(C.떤.뽀옴/葛必道 옮김, 생명의말씀사, 1954.8.12.첫/1955.12.1.둘)

《郡勢一覽 1966》(산청군, 1966.7.20.)

《국어 4-1》(문교부 엮음, 국정교과서주식회사, 1984.3.1.)

《읽기 6-1》(문교부 엮음, 국정교과서주식회사, 1990.3.1.)

《舊石器時代》(드니즈 드 쏜느빌르 보르드/최무장 옮김, 탐구당, 1981.2.25.)

《지금 馬山은》(전문수·오하룡 엮음, 경남, 1987.10.17.)

《지는 꽃이 피는 꽃들에게》(김희수, 광주, 1988.5.30.)

《TV 가이드 474호》(원문갑 엮음, 서울문화사, 1990.10.20.)

《TV 가이드 483호》(원문갑 엮음, 서울문화사, 1990.12.22.)

《옛말 사전》(이영철 엮음, 을유문화사, 1949.9.10.첫/1953.7.10.재판)

《책과 인생 3호》(이승우 엮음, 범우사, 1992.5.1.)

《책과 인생 6호》(이승우 엮음, 범우사, 1992.8.1.)

《책과 인생 8호》(윤형두 엮음, 범우사, 1992.10.1.)

《책과 인생 12호》(윤형두 엮음, 범우사, 1993.2.1.)

《범우 Book Club 3호》(편집부 엮음, 범우사, 1991.6.26.)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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