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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9월 15일부터

마음수다를 씁니다.

이 마음수다는

‘소설’이라고 하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소설’이거든요.

날마다 하루 한 바닥씩

옮겨적으라는

마음소리를 듣고서

그야말로 바지런히

옮겨적는 나날입니다.

“숲노래 소설”이란 이름을 붙여 봅니다.

“글수다”란 이름도 붙입니다.

다시 말씀을 여쭙지만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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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소설


“어제는 어떠했니?” “응? 어제?” “그래, 어제이지, 뭐 다른 날이니?” “아, 네가 목소리로 찾아온 어제?” “그래.” “그게, 글쎄, 뭐라고 말을 못 하겠는데,” “뭐, 아직 모를 수 있고, 앞으로도 모를 수 있어. 그러나 네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 “…….” “네가 안 하기로 생각하면 안 할 테고, 네가 못 한다고 생각하면 못 하겠지. 네가 하기로 생각하면 바로 그곳부터 할 테고, 네가 즐겁다고 노래하면 언제나 그곳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하루를 열지.”  “…….”


2021.9.16.나무.


두 가지를 물어본다. “네 아이가 무엇을 영 못하는구나 싶으면 넌 아이한테 무슨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하고 “네 아이를 언제까지 어떤 눈빛·마음·몸짓·말씨로 지켜보거나 기다리겠는가?”를.


이렇게 묻더니 “너는 네가 영 못하는구나 싶을 적에 너 스스로 무슨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묻더니 “너는 너 스스로 언제까지 어떤 눈빛·마음·몸짓·말씨로 너를 지켜보거나 기다리겠는가?” 하고 더 묻는다. 모두 네 가지이지만, 곰곰이 보면 한 가지를 묻는다고 느끼지만 도무지 아무 말을 못하고서 멍하다.


우리 아이나 곁님이 무엇을 영 못한다면 억지로 이끌거나 가르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길을 가 보라고 얘기하겠구나 싶고, 그래도 스스로 더 해보고 싶다 하면 스무 해이든 마흔 해이든 백 해이든 이백 해이든 즈믄 해이든 그저 즐거이 지켜보고 기다리겠구나 싶다.


그런데 아이들하고 곁님이 아닌 나라면? 나는 나를 차분히 지켜보면서 기다릴 줄 알까? 나 스스로 부드럽거나 상냥히 다독일 줄 알까? 더 느긋이 천천히 해보라고 스스로 마음한테 속삭일 줄 알까? 누가 나한테 무엇을 왜 아직 못 하거나 안 하느냐고 물을 적에 ‘남’이나 ‘아이들’이나 ‘곁님’한테 말하듯 ‘나’한테 말할 줄 알까?


꿈에서 만난 사람은 자꾸자꾸 묻다가 빙그레 웃는다. 이 네 가지이자 한 가지 물음을 얼른 얘기하지 않아도 되고, 잊어도 된다고 덧붙인다. 마지막에 덧붙인 말대로, 이 꿈이야기는 꿈에서 깨고 곧바로 거의 잊었다. 떠올리려 해도 영 안 떠올랐다. 이러다가 붓을 쥐니 비로소 새벽녘 어지럽던 꿈모습을 조금 옮길 수 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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