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말빛


숲에서 짓는 글살림

53. 수수밥



  요즘에는 거의 들을 일이 없으나 어린배움터(초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씨 가운데 ‘기술입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땅이 좁고 밑감(자원)이 적지만 사람은 많으니 저마다 ‘솜씨·재주·힘’을 키워서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면서, 어린배움터에서 뭇 길잡이가 ‘기술입국’을 참 자주 읊었는데, 2020년에 우리말로 나온 어느 일본 만화책에서 이 말씨를 새삼스레 보았습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합니다만, 설마 싶은 웬만한 한자말은 일본을 거쳐서 들어왔습니다. ‘기술입국’은 섬나라인 일본이 스스로 서려는 뜻으로 지은 말씨더군요.


  아홉열 살이든 열두어 살이든 아이들이 ‘기술입국’이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까요? 어른이라면 다 알아들을까요? 일본 말씨를 들여오더라도 ‘솜씨나라·재주나라’처럼 옮길 생각은 왜 안 했을까요?


사람들에겐 다양한 특징이 있고

→ 사람들은 다 다르고

→ 사람들은 모두 다른 빛이고

→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고

→ 사람들은 저마다 빛이 있고


  한자말 ‘특징’을 낱말책에서 뜻을 살피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지 싶습니다만, 이러다 보니 이 한자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분이 대단히 많습니다. ‘특징 : 특별히 눈에 뜨이는 점’이고, ‘특별 : 보통과 구별되게 다름’을 가리킨다는데 ‘구별 : 차이가 남’이요, ‘차이 : 서로 같지 아니하고 다름’이라지요. 간추리자면 ‘특빙·특별·구별·차이 = 다르다’입니다. 우리말 ‘다르다’를 제대로 가릴 줄 모르면서 애먼 한자말을 아무렇게나 쓰는 셈이니 “다양한 특징” 같은 겹말을 쓰고도 겹말인 줄 모르기 일쑤입니다.


  수수하게 ‘다르다’라 하면 되고, ‘남다르다’나 ‘빛다르다’라 할 만하고, ‘도드라지다·두드러지다’나 ‘돋보이다·도두보이다’라 할 만해요. 꾸밈말을 붙여 “모두 다르다·저마다 다르다”나 “참 다르다·무척 다르다”라 해도 될 테지요.


  부치거나 튀길 적에 ‘기름’을 씁니다. 한자로는 ‘유(油)’라 하는데, 기름이 기름인 까닭을 생각하거나 가르치는 어른은 드물어요. ‘기르다’에서 온 ‘기름’인데 말이지요. ‘포도씨기름’이든 ‘콩기름’이든 ‘돌기름(석탄)’이든, 살점이 알뜰히 붙은 열매로 나아가기에 고맙게 얻습니다. 수수한 말씨 하나이지만 어느 말이 어떤 뿌리로 퍼지는가를 짚으면서 알맞게 가려서 쓰고 널리 살려서 쓰는 길을 밝힌다면 누구보다 아이들이 오늘 우리 삶을 슬기롭게 배우기 마련입니다.


일일일식(一日一食)의 소식이었다

→ 하루한끼만 조금 먹었다


  하루에 한끼를 먹는다면 ‘하루한끼’라 하면 됩니다. 이 말씨가 낱말책(국어사전)에 없으면 우리가 먼저 스스로 즐겁게 써서 퍼뜨리면 됩니다. 하루에 두끼를 누리면 ‘하루두끼’로, 하루에 세끼를 누리면 ‘하루세끼’처럼 새말을 알맞게 퍼뜨리면 되어요.


  이 땅에서 삶을 짓기에 이 땅에서 비롯한 말씨를 가만히 추슬러서 말을 짓습니다. 굳이 뛰어나야 하지 않습니다. 애써 훌륭하게 보여야 하지 않습니다. 수수하게 생각하면서 수수하게 말합니다. 투박하게 살림을 지으면서 투박하게 사랑할 말씨를 가다듬습니다.


  조금 먹으니 “조금 먹는다”고 말해요. 구태여 ‘소식’이란 한자말을 써야 하지 않아요. 많이 먹으니 “많이 먹는다”고 말합니다. 굳이 ‘대식’이란 한자말은 안 써도 됩니다. 밥을 많이 먹으니 ‘밥보·밥꾼·밥꾸러기’입니다. ‘밥돌이·밥순이’라 해도 어울려요. 때로는 ‘밥고래·밥깨비’처럼 재미나게 쓸 만합니다.


  그리고 여느 사람이 먹는 여느 밥자리란 ‘한식’도 ‘가정식’도 아닌 ‘수수밥’이나 ‘조촐밥’일 테지요. ‘단출밥’이나 ‘단촐밥’이라 해도 되어요. 한글로는 ‘소식’이라 적으나 한자가 다른 ‘소식(消息)’이 있어요. 어느 모로 보면 이 한자말은 그냥 쓰는 길이 낫다고 하지만, ‘알리다·알려주다·알림’이나 ‘알림글’로 풀어낼 만합니다. ‘다른일·딴일·새일’이나 ‘목소리·말·말씀·얘기·이야기’로 풀어내어도 돼요. 자리를 살피고 때를 헤아리면 자리랑 때에 맞는 말씨가 하나둘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말이 없기에 “말이 없다”고 해요. ‘무소식’이 아닙니다. 말이 없으니 ‘조용하다’고 하지요. 조용하니까 잘 지내나 보지요.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닙니다. 말이 없기에 걱정이 없고, 조용하니까 잘 있습니다.


 귀신 같은 솜씨 → 빼어나다 . 솜씨있다


  언제부터인가 퍼진 “귀신 같은 솜씨”는 얼마나 알맞을까요. 왜 ‘귀신’ 같다고 할까요. 눈에 안 보일 만하도록 무엇을 한다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으나 어느새 한다는, 이러한 결이라면 ‘감쪽같다’라 했습니다. “감쪽같이 해낸다”고 하지요. 감쪽같이 해내는데 보기에 좋다면 ‘빼어나다·훌륭하다’요 ‘솜씨있다·재주있다’입니다.


  여기에서도 생각해 봐요. ‘솜씨있다·재주있다’를 얼마든지 새말로 삼아서 쓸 만합니다. ‘멋있다·값있다·뜻있다’처럼 어떤 모습이나 몸짓이나 몸놀림이 남다르다고 여기면서 새말을 짓습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꿈있는’ 마음이 되기를 바라요. 어른이라면 언제나 ‘사랑있는’ 살림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 한 마디를 살리는 길은 매우 쉽습니다. 스스로 살림길을 아름다이 다스리고 즐겁게 가꾸려는 마음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새삼스레 말을 짓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삶이 즐겁지 않다면 옆사람 살림을 훔치거나 빼앗으려 들어요. 또는 남을 쳐다보면서 흉내를 내거나 따라합니다. 일본사람이 쓰던 ‘기술입국’ 같은 말씨를 고스란히 흉내낸 이 나라 어른이 바로 안 즐거운 마음을 낱낱이 드러낸 셈이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홀로서기(독립)를 할 노릇입니다. 혼자서 서기에 홀로서기라면, 즐겁게 사랑으로 살림을 세운다면 ‘사랑서기’입니다. 누구한테 기대지 않으려고 애쓴다면 ‘스스로서기’일 텐데, 서울바라기를 하지 않으려는 눈빛이라면 ‘마을세우기’를 하겠지요. 마을세우기 곁에는 ‘마을짓기’가 있을 테고, 마을짓기 둘레에는 ‘마을가꾸기’에 ‘마을나눔’이 있기 마련입니다.


 수수살림 ← 미니멀라이프 . 간소한 생활


  수수하게 누리는 밥처럼 수수하게 짓는 살림입니다. 영어나 한자말이 아니어도 우리 살림을 너끈히 펼칠 만합니다. ‘수수살림’을 짓고, ‘작은살림’을 돌보고, ‘조촐살림’을 꾸립니다. ‘들꽃살림’을 품고, ‘푸른살림’을 펴며, ‘마을살림’을 일구지요.


  수수하게 쓰는 말이니 ‘수수말’입니다. ‘일상용어’나 ‘생활용어’가 아닌 ‘수수말’이요 ‘여느말’입니다. ‘들꽃말’이자 ‘삶말’이고요. 우리는 누구나 들꽃입니다. 저마다 다르게 피고 지는 들꽃 한 송이입니다. 똑같은 들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르익는 봄날에 나무 곁에 서 볼까요? 나무 한 그루에 돋는 나뭇잎 가운데 똑같은 무늬나 빛깔은 하나도 없습니다.


  얼핏 수수하게 보여도 다 다르면서 빛나는 들꽃이요 나뭇잎이듯, 우리가 늘 혀에 얹는 말 한 마디는 새록새록 수수하면서 빛나는 넋이 되면 좋겠습니다. 시골 할매가 말을 꾸밀 일이 없고, 시골 할배가 억지스레 말을 치레하지 않습니다. 수수하게 시골말을 쓰는 곳에 아름드리숲이 무럭무럭 큽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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