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할아버지 (2021.6.20.)

― 광주 〈일신서점〉



  첫여름에는 한창 익는 매화알을 훑어서 재웁니다. 폭 재우지요. 어릴 적에는 이런 말을 얼핏 지나치면서도 재미있구나 싶었어요. “열매를 재운다”니, 잠을 자도록 한다는 뜻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가만 보니 그렇지요. 달콤가루에 재울 적에 여러 달이나 한두 해를 가만히 두어요. 비로소 뚜껑을 여는 그날까지 고이 잠들도록 둡니다. 두고두고 잠들기에 새롭게 깨어나요. 애벌레라는 몸에서 나비란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숨결처럼, ‘재울’ 적에는 어쩐지 새롭게 ‘채우는’ 빛이 됩니다.


  문득 작은아이한테 “광주에 있는 책집에 다녀와 볼까?” 하고 묻습니다. “그럴까요?” 하고 되받는 아이하고 짐을 꾸려서 길을 나섭니다. 아침해를 받으면서 즐겁게 걷습니다. 고흥서 광주까지 두 시간이 넘는 버스를 타야 하지만, 이윽고 전철로 갈아타지만, 또 땡볕을 받으며 걷지만, 이렇게 책집마실을 나오는 여름날은 짙푸른 나뭇잎에 반짝이는 기운을 한껏 누립니다.


  광주 금남로 한켠에서 헌책집을 꾸리는 〈일신서점〉입니다. 자전거를 끌면서 헌책을 모으는 할배는 나날이 등허리가 굽습니다. 얼마 앞서 예전 자리에서 옮겼다고 하는데, 매우 조그맣습니다. 얼추 1/8 즈음 줄인 자그마한 헌책집에서 책손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여름에는 나무그늘에 앉아서 책손을 기다리더라도, 겨울에는 어디에서 책손을 기다리려나요.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는 길가에서 추위를 한몸에 받으면서 기다릴까요. 겨우 걸상 하나 놓고서 앉을 만한 안쪽에서 기다릴까요.


  책을 석 자락 고릅니다. 크기를 확 줄이면서 7/8에 이르는 책을 버려야 했을 텐데, 헌책집에서 버리는 책은 그야말로 숨을 거두는 끝길입니다. 두 평쯤 될 곳에는 어떤 책을 얼마나 건사할 만할까요. 이곳에 깃든 책은 누가 눈여겨볼까요. 2000년에 나온 우편번호부를 넘기면서 아직 잿빛집에 덜 잡아먹힌 마을이름을 헤아립니다. 얼추 이무렵부터 잿빛집에 우편번호가 새로 붙었지 싶어요. 요새는 잿빛집을 바탕으로 우편번호를 짜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온몸으로 품은 책집지기 할아버지 곁에 부채가 있고, 거리나무가 있습니다. 이 거리나무 곁에서 깨어난 매미가 노래하고, 이따금 잠자리하고 나비가 찾아들 테며, 여름이 저물면 풀벌레가 노래하러 살며시 찾아오겠지요.


  날마다 새롭게 깨우는 책이 묵어 갑니다. 오롯이 새로 일깨우는 책이 잠들어 갑니다. 여러 손길을 돌고돌면서 빛나던 책이 더는 돌고돌 틈을 찾지 못하면, 눈빛도 생각도 숨결도 싱그러이 깨어날 길이 없다는 뜻이지 싶습니다. 돌고돌면서 언제나 맑은 빗물과 구름처럼, 모든 책은 돌고돌 적에 비로소 빛나고 해맑습니다.


ㅅㄴㄹ


《우리말 역순사전》(유재원, 정음사, 1985.9.25.)

《옛말본》(허웅, 과학사, 1969.10.9./1982.3.15.세벌고침)

《우편번호부 2000·5》(편집부, 정보통신부, 2000.5.1.)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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