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에 실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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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숲에서 짓는 글살림

51. 참



  요새는 듣기가 쉽지 않으나 1990년 무렵까지 둘레 어른은 곧잘 “참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무렵에는 “어진 사람”이란 말도 으레 들었습니다. 요새는 ‘참하다’보다는 한자말로 ‘신사적·정숙·품위·품격·인품·신실·성인군자·지성·모범·귀감·온화·정직·성실·예의·예절·양반·민주·평화’를 쓰는구나 싶어요. 여러 가지 한자말을 들었습니다만, 우리말 ‘참하다’는 이런 여러 결을 아우르는 깊고 너른 말씨입니다.


  예전 어른이 흔히 읊던 ‘어질다’를 놓고는 요사이에 ‘지혜·인성·지성·현명·자애·명철·명석·도덕적·덕·총명·이지·선견지명’ 같은 한자말을 쓰는구나 싶어요. 다시 말하자면 우리말 ‘어질다’는 이런 숱한 결을 품는 깊숙하면서 넉넉한 낱말이에요.


  때랑 곳에 따라 말이 바뀐다고 하지만, 이보다는 우리 스스로 삶이나 살림을 바꾸기에 말을 바꾼다고 느낍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날이 “참한 사람”이나 “어진 사람”이 줄어든다는 뜻이로구나 싶어요. 어느 한 가지만 솜씨가 있는 사람이 아닌, 두루 깊으면서 너른 사람이 자취를 감춘다는 소리이지 싶습니다. 어느 하나만 뛰어나지 않고, 고루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뒤로 밀리거나 파묻히는 흐름인 터라, ‘참하다·어질다’를 우리가 혀에 얹거나 손으로 옮길 일이 시나브로 사라지는 셈이라고 느껴요.


 그 덕에 → 그래서 / 그 탓에 / 그 때문에

 이웃님 덕에 → 이웃님이 도와 / 이웃님이 있어 / 이웃님 힘으로

 덕이 높다 → 그릇이 깊다 / 마음이 높다 / 숨결이 높다

 아름다운 덕이다 → 아름다운 빛이다 / 아름답다


  한자말을 쓰기에 나쁘지 않습니다만, 한자말은 ‘누구나’ 쓰던 낱말이 아닌, 나라지기·벼슬아치·우두머리 곁에서 조아리던 몇몇 붓쟁이가 쓰던 낱말입니다. 흙을 사랑하고 아이를 돌보고 숲을 가꾸고 살림을 빛내고 마을을 짓던 수수한 사람들, 이른바 ‘흙지기·여름지기(농부)’는 한자말을 안 썼고, 한자말을 알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흙에서 길어올린 낱말을 두레처럼 썼고, 흙에서 얻은 낱말을 어깨동무로 썼으며, 흙으로 지은 낱말을 함박웃음으로 썼어요.


  외마디 한자말인 ‘덕(德)’이 치고 들어온 자리를 하나하나 짚다가 돌아봅니다. 우리는 요새 ‘때문·탓·영문·터문·터·턱·까닭’ 같은 낱말을 얼마나 가려서 알맞게 쓸 줄 알까요? 오늘날 어른은 이러한 말씨를 어린이한테 얼마나 제대로 짚어내면서 물려주는가요?


 다시 원상복귀되었다 → 다시 바로잡았다 / 돌려놓았다

 원상복귀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 돌리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원상복귀를 요구하는 의견이 다수이다 → 되돌리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


  낱말책에 ‘원상복귀’가 없으나, 이런 말을 쓰는 분이 꽤 됩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살짝 다른 ‘원상복구’가 있어요. 둘 다 낱말책에 없는데, 적잖은 어른은 두 말씨 ‘원상복귀·원상복구’를 헷갈려 합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어린이는 두 말씨를 놓고 머리가 지끈거릴 뿐 아니라, 뭔 소리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아버지 손에 의해 원상복구가 되다 → 아버지 손으로 바로잡다

 원상복구를 완료하다 → 예전대로 해놓다 / 처음대로 해놓다

 어디까지 원상복구를 해야 하는가 → 어디까지 돌려놓아야 하는가


  나이를 먹었기에 어른이 되지 않아요. 나이만 먹는 사람은 ‘늙은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늙은이’라는 낱말이 자칫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을 깎아내릴까 걱정스럽다면서 ‘어르신’으로 고쳐서 쓰자고들 합니다.


  자, 생각해야지요. 나이만 먹으면 어른이나 어르신이 아닌 늙은이입니다. 늙은 말씨는 낡은 말씨입니다. 고치거나 손질하거나 추스르거나 바로잡을 말씨입니다.

  우리가 왜 ‘어른·어르신’하고 ‘늙은이’라는 낱말을 갈라서 쓰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나이가 아닌 철이 들어서 슬기롭고 어질며 참한 사람으로 서기에 비로소 어른이요 어르신입니다.


  슬기롭지 않고, 어질지 않으며, 참하지 않다면, 이때에는 그저 나이만 먹는 터라 늙은이라는 모습이 됩니다. 어린이 곁에서 어떤 모습이나 몸짓으로 서렵니까? 어린이한테 어떤 말씨를 물려주는 마음, 그러니까 슬기로운 말이나 어진 말이나 참한 말을 물려주는 눈빛이 되렵니까?


 원상(原狀) : 본디의 형편이나 상태. ≒원태

 복귀(復歸) : 본디의 자리나 상태로 되돌아감

 복구(復舊) : 1. 손실 이전의 상태로 회복함


  우리말로 하자면 ‘처음(←원상)’이요, ‘돌아가다(←복귀)’이며 ‘돌려놓다·고치다(←복구)’입니다.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처음으로 돌아가다”나 “예전대로 해놓다”라 하면 다 알아듣습니다. “이렇게 고치자”나 “이처럼 바로잡자”고 말하면 어린이도 어른도 몽땅 알아들어요.


  어떤 말을 어느 자리에 어떤 마음이 되어 쓸 적에 참하거나 어질는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잊는 말씨란, 우리가 스스로 잊는 삶이자 살림이자 사랑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버린 말결이란, 우리가 스스로 버리는 삶이자 살림이요 사랑입니다.


  생각에 날개를 달아야 슬기롭다고 하듯, 말에 날개를 달아야 어질면서 참합니다. 새로 나오는 갖가지 살림살이나 연장을 가리키는 이름을 어떻게 붙이면 즐거우면서 환할까요? 우리한테 우리말이 있다면, 우리말로 하나씩 가다듬도록 마음을 기울일 적에 비로소 어른스러우며 어르신 자리에 설 만합니다.


 참말


  서울내기 말씨를 보면 으레 ‘정말로(正-)’입니다. 시골내기 말결을 보면 흔히 ‘참말로’입니다. ‘참으로’는 서울내기도 시골내기도 두루 쓰더군요. 시골에서 살기에 스스로 깎아내리지는 않는가 돌아보면 좋겠어요. 서울에서 산다고 스스로 높이지는 않는지 되짚으면 좋겠습니다. 시골에서 서울이나 광주 같은 큰고장으로 ‘올라가지’ 않고 ‘갈’ 뿐이듯, 서울이나 광주 같은 큰고장에서 시골로 ‘내려가지’ 않고 ‘갈’ 뿐이듯, 참말로 말빛을 어질게 바라보기를 바라요. 참으로 말넋을 참하게 가꾸기를 바랍니다.


  참말로 ‘참말(참다운 말·참된 말)’을 쓸 어른입니다. 참으로 ‘참글(참다운 글·참된 글)’을 쓸 어르신입니다. 떡고물을 주기에 거짓말이나 거짓글을 내놓는다면 어른이 아닌 늙은이입니다. 자리값이나 이름값을 건사하겠다며 꾸밈말이나 꾸밈글을 편다면 어르신 아닌 늙은네입니다.


  뒤숭숭한 나라일수록 “늙은 사람”이 아닌 “어진 사람”이 슬기롭게 일해야지 싶습니다. 어지러운 판일수록 “낡은 말”이 아닌 “수수한 사람이 흙에서 짓고 숲에서 가꾼 참한 말”을 펴야지 싶습니다.


  한꺼번에 고치거나 되돌리거나 돌려놓거나 바로잡으려고는 안 해도 됩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 가다듬으면 됩니다. 언제나 한 걸음씩입니다. 날마다 한 걸음씩 새로 내딛듯, 우리말을 차곡차곡 추스르는 어른하고 어르신이 이웃님이 되고 동무님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 사랑스레 우리말을 새롭게 헤아리면서 혀랑 손에 얹는 분이 저희 보금자리 곁에서 어른이나 어르신으로 있기를 빕니다.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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