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쪽자취 (2020.10.30.)

― 전주 〈한가서림〉



  군대에 들어가던 1995년까지 소설책을 곧잘 읽었으나, 군대를 마친 뒤부터 소설은 아예 안 읽다시피 하고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어린이책을 펴내는 출판사에서 책팔이(영업부) 일꾼으로 지내던 2000년 무렵까지 역사책을 꽤 읽었지만, 어린이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엮는 일꾼으로 지내는 2001년부터 역사책도 아예 안 펴다시피 합니다. 소설책이나 역사책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으나 덧없더군요. 소설로 삶을 읽기보다는 ‘온몸으로 마주하는 삶에서 고스란히 삶을 읽는’ 길이 낫겠다고 느꼈어요. 다른 책을 바탕으로 엮는 역사책으로 자취를 읽기보다는 ‘온마음으로 사람과 풀꽃나무와 별을 마주하면서 자취를 읽는’ 길이 낫다고 느꼈고요.


  1947년에 나온 《20th century bookkeeping and accounting 19th edition》은 대학교재로 쓴 듯합니다. 이 책을 읽은 분 자취가 사이에 ‘단국대학 제2부 1966년 제1학기 강의시간표’로 남아요. 1966년에 이 영어책으로 ‘회계’를 배웠구나 싶어요. 푸른배움터(고등학교)를 다니며 읽었지만 《미래의 충격》 책낯이 새삼스러워 뒤적였더니 책자취에 “辭典과 良書의 殿堂 民衆書籍 全州電話 2-6476”라 적힌 쪽종이가 붙습니다. ‘전주 민중서적’ 자취예요.


  지난날에는 책집에서 책을 팔 적에 ‘일본처럼 팔림종이를 붙이거나 끼워’서 팔림새를 살폈습니다. 이 팔림종이가 온것으로 남은 책이라면 책집에서 안 팔린 채 돌고돌았다는(반품·재고처리) 뜻이요, 뒤쪽이 뜯겼다면 팔렸다는 뜻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종잇조각이지만, 책이 걸어온 자취입니다. 마을에서 사람하고 사람 사이에서 흐른 책이 남긴 자국입니다.


  꾸러미(전집)로 파는 어린이책은 있되, 하나하나 땀흘려서 엮은 어린이책이 드물던 무렵에 베끼거나 훔치거나 ‘덤핑’이란 이름으로 나돌던 어린이책이나 그림책이 꽤 많습니다. “국제판컬러텔레비전 최신가정학습도서관”도 이런 꾸러미 가운데 하나일 텐데요, 글·그림을 이우경 님이 맡았군요. 책낯하고 속그림이 다르고, 그린이를 따로 안 밝혀 놓아서 못 알아보기 좋겠더군요. 그러나 속그림을 보고는 바로 알아챘습니다. 우리나라 그림책 첫길을 연 분이 이우경 님입니다. 어린이 삶을 헤아리고 어린이 앞길을 살피면서 어린이스럽게 붓을 잡은 분이에요.


  새로 나오는 책도 틀림없이 알차거나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새책이 나오려면 옛책이 바탕이 됩니다. 새로 짓는 터전이나 살림도 참으로 알뜰하거나 멋집니다. 그런데 옛자리나 옛살림이 밑돌이 되기에 새길을 닦거나 열어요. 새책 곁에 헌책이 있으니 책숲이 빛나요. 헌책 곁에 새책이 나란히 있어서 서로 곱지요.


ㅅㄴㄹ


《샤갈/타오르는 추억》(벨라 샤갈 글·마르크 샤갈/김성림 옮김, 홍성사, 1978.8.20.)

《국제판컬러텔레비전 50 최신가정학습도서관 : 효녀심청》(이우경 글·그림, 학원출판공사, 1990.5.25.)

《만화 사자소학》(박진우 엮음, 고려출판문화공사, 1990.4.30)

《빠빠라기》(에리히 쇼일만/김정우 옮김, 예지원, 1990.7.15.)

《가까이》(이효리, 북하우스, 2012.5.24.)

《20th century bookkeeping and accounting 19th edition》(Paul.A.Carlson·Hamden L.Forkner·Alva Leroy Prickett, South-Western pub, 1947)

《미래의 충격》(앨빈 토플러/윤종혁 옮김, 한마음사, 1982.1.5.10./1982.3.20.5벌)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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