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책샘 (2020.9.26.)

― 서울 〈숨어있는 책〉



  열일곱 살에 들어선 푸른배움터는 ‘길들기’를 가르쳤습니다. 시키는 대로 따라야 배움수렁에서 살아남아 열린배움터로 가고, 인천을 벗어나 서울이란 ‘큰물’에서 놀며 돈을 잘 벌고 이름을 얻는 자리를 쥘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길들기’를 안 따른다면 배움수렁에 푹 잠긴 채 돈이며 이름이며 멀어진다고,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는다면 나라에서는 바로 내치리라고 윽박지르는 굴레도 가르쳤습니다.


  아무튼 1993년 배움수렁 한복판에 이르도록 이모저모 배우는 사이에 헌책집에 눈을 뜬 뒤로 ‘훈민정음’이며 ‘목민심서’이며 ‘판소리 다섯 마당’을 스스로 찾아내어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읽어 보는데, 스스로 챙겨서 읽어 보니 ‘시험문제로 가르는 정답’하고는 딴판이었어요. 김소월이나 한용운이나 신동엽 노래도 ‘시험문제로 가르는 틀’하고는 달랐어요.


  마침종이(졸업장)를 따는 길을 가면 ‘길들기’에 사로잡힌 채 속내를 읽는 눈하고 멀어지겠더군요. 갈림길이었어요. 돈·이름·힘을 얻도록 길들며 고분고분하느냐, 삶·사랑·살림을 짓도록 숲으로 노래하며 가느냐이더군요. 기꺼이 마침종이를 찢어버렸습니다. 숲을 노래하는 날개를 달고 싶어 애벌레처럼 고치에 깃들어 잠들기로 했습니다. 없는 돈을 긁어 헌책집에서 책을 장만하고, 열 자락을 읽고서야 한 자락을 장만하는 버릇을 익혔습니다.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달려 길삯을 책값으로 돌리고, 하루 한두끼만 아주 가볍게 먹고서 밥값도 책값으로 바꾸었습니다. 새벽에 새뜸을 돌리다가 헌옷통에서 헌옷을 주워입었어요. 옷값도 책값으로 삼았습니다. 먹고 입고 자는 모든 돈을 책으로 삼았습니다.


  하루를 책집에서 살며 어제랑 오늘을 배웁니다. 책집으로 걸어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멀고먼길을 살며 이웃이랑 마을을 배웁니다. 적게 먹고 안 쓰는 살림으로 가고 온통 맨손이랑 맨발로 하며 마음이랑 사랑을 배웁니다. 밥을 안 먹고 책을 읽는 배움벌레를 상냥히 바라본 여러 책집지기님이 “어떻게 밥도 안 먹으면서 책만 사느냐?”면서 곧잘 “책은 나중에 보고 같이 밥부터 먹자!”고 잡아끌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골목이라는 마을에 깃든 〈숨어있는 책〉은 스스로 숨듯이 고요히 잠든 책을 스스로 눈을 밝혀 즐거이 찾아내어 만나도록 이끄는 샘터라고 생각합니다. 책샘터입니다. 바다에 닿기까지 들이며 숲이며 마을을 고루 적시는 물줄기는 깊은 멧골에 고즈넉히 ‘숨은’ 조그마한 샘에서 비롯합니다. 헌책집이란 책샘터이지 않을까요? 마을책집이란 책샘자리일 테지요? 가난한 배움벌레한테도 곁을 주고, 가멸찬 책버러지한테도 틈을 주는 이 책샘집은 언제나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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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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