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책 사이에서 (2020.6.9.)

― 부산 〈고서점〉



  어린배움터나 푸른배움터를 다니면서 ‘책을 읽었나?’ 하고 돌아보면 여느 글책보다 그림꽃책(만화책)을 즐겼습니다. 글책이 없지는 않았으나, 너무 많구나 싶은 꾸러미(전집)로 있는 글책은 처음부터 질렸어요. 어머니나 아버지가 며칠마다 책집마실을 하면서 한 자락씩 장만해 주셨다면 글책읽기를 꽤 즐겼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지난날 숱한 어버이는 낱책 아닌 꾸러미로 책을 들이곤 했어요. 다들 바빠서 책집마실을 하기 버거우시기도 했고, 낱책으로 살 적보다 꾸러미로 살 적에 한결 싸면서 덤도 준다고 여기셨지 싶어요.


  두고두고 여민 꾸러미는 아름답습니다만, 장삿속으로 여민 꾸러미는 아름답지 않아요. 하나하나 선보여 꾸러미를 이루기란 어려울까요? 꾸준히 나누며 꾸러미가 되도록 책집살림을 꾸리기는 힘들까요?


  보수동책골목을 떠난 〈고서점〉은 마을 한켠에, 왁자한 골목 한켠에 고즈넉히 있어요. 부산이야 워낙 사람이 많고 길·골목이 좁으니 늘 사람물결입니다. 새터에 깃든 〈고서점〉 둘레에는 오가는 사람으로 북적이는데, 먹고 마시고 입는 가게에서 살짝 눈을 돌리면 읽고 새기고 사랑하는 길을 들려주는 쉼터를 만날 만합니다.


  북적이는 사이에서 쉬는 책집입니다. 복닥거리는 크고작은 고장 한켠에서 마음을 달래는 책집입니다. 바쁜 틈에 한갓지게 삶을 돌아보는 책집입니다. 쳇바퀴를 멈추고서 온마음을 온사랑으로 채우려고 북돋우는 책집입니다.


  묵은 책을 들추다가 어느 책 사이에 깃든 《保科氏 大正國語讀本詳解》를 봅니다. 겉그림이랑 책자취는 떨어져 나간 듯합니다. 뭘까 하고 두리번하면서 들여다보니, 이웃나라에서 선보인 ‘곁배움책(참고서)’이로군요. 마땅한 노릇입니다만, ‘국어’란 이름은 이웃나라가 스스로 총칼을 앞세워 여러 나라로 쳐들어가며 태어난 말씨예요. 이웃나라는 총칼나라가 되기 앞서까지 그저 ‘말·일본말’을 썼으나, 총칼로 우리나라랑 중국이랑 하나씩 집어삼키며 ‘國語·대동아공영’을 부르짖었습니다. 밑자락을 따지면 무서운 이름인 ‘국어’요, ‘국(國-)’을 붙인 말씨입니다. ‘국민’도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총칼질이 서린 낱말이에요.


  우리는 배움터에서 참다운 배움책을 건사할 수 있을까요? 달달 외워서 배움수렁으로 달리는 그런 꾸러미가 아닌, 삶을 슬기롭게 사랑하면서 숲으로 나아가는 사람으로 설 길동무가 될 아름책을 곁에 둘 수 있나요? 그리고 총칼질·다툼질·겨룸질을 멈추고서 ‘국(國)-’붙이 말씨를 몽땅 걷어치울 수 있나요? 책 사이에서 아름말이랑 아름마을이랑 아름길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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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科氏 大正國語讀本詳解 卷一 (修正版)》(東京辭書出版社 編輯所엮음, 東京辭書出版社, 1918.1.15.)

《鯨, その科學と捕鯨の實際》(大村秀雄·松浦義雄·宮崎一老, 水産社, 1942)

《斗溪雜筆》(이병도, 일조각, 1956.9.20.)

《부산 동광국민학교 17회》(1962.2.) 졸업사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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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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