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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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란 굴레 아닌 살림길을 (2014.9.21.)

― 부산 〈대영서점(새동화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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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자락이 빛나기까지는, 책을 쓴 사람하고 책을 엮은 사람하고 책을 펴낸 사람이 있습니다. 갓 나온 책을 다루는 새책집 일꾼이 있고, 이 책을 알아본 책벗이 있으며, 책벗은 다른 책벗을 헤아리면서 이녁 책을 내놓습니다. 책은 갓 태어날 적에도 읽히지만, 두고두고 되읽혀요. 도서관은 온갖 책을 찬찬히 보듬어 오랫동안 건사하면서 읽히는 징검다리입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도 건사하지 못해 버리는 책이 있으니, 헌책집은 모든 묵은 책을 차근차근 매만지면서 되살릴 책을 추립니다.


헌책집을 다니다가 때때로 ‘같은 책을 두세 자락’ 더 장만합니다. 온누리에 책이 얼마나 많은데 ‘같은 책을 뭐 하러’ 또 갖추느냐고 물을 만한데, 새책집 책시렁에서 사라진 책은 앞으로 도서관에서 다시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헌책이 새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습니다. 새옷을 입고 태어나더라도 처음 나온 옛모습을 간직한 책에는, 이 책을 처음 장만해서 읽은 사람이 남긴 손길과 자국이 있습니다. 책을 쓴 사람 이야기에, 책을 읽은 사람 이야기가 나란히 있어요.


숱한 책을 쓰다듬고 건사하고 읽고 품으며 생각합니다. 어느 글쓴이는 가난한 살림에 글빛을 밝힙니다. 버지니아 울프처럼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글쓴이도 글빛을 밝힙니다.


가난해야 깨끗하게 글을 쓰지 않습니다. 가멸차면 지저분하게 글을 쓰지 않습니다. 돈이 아닌 마음에 따라, 마음을 다스리는 눈빛에 따라, 눈빛을 사랑하는 손길에 따라 글결이 다르다고 여겨요. 무엇보다 틀에 매이지 않을 적에 글이 빛납니다. 이른바 ‘전통·형식·사상’에 얽매이지 않을 적에 오래오래 읽히며 슬기로운 새빛으로 흐르지 싶어요. 참말 그렇습니다. ‘전통·형식·사상’은 굴레이기 일쑤입니다. 우리 생각을 얽매는 굴레예요. 흔히 말하는 ‘전통’이란 무엇일까요? 임금님이 따르던 버릇이 전통일까요? 권력자나 지식인이 섬기는 길이 전통일까요? 우리나라로 치면, 양반이나 사대부가 따르던 ‘중국 문화’를 함부로 전통이라고 해도 될까요? 지난날 이 땅에서 살던 99퍼센트가 넘는 사람은 ‘글(한자)을 모르는 채 살았’으나, 글을 몰랐어도 입과 몸과 마음과 사랑으로 삶을 지었습니다. ‘글(한자)을 아는’ 옛날 권력자나 지식인은 오로지 ‘중국 섬기기’를 일삼았습니다.


한자문화권이라는 얘기를 곧잘 끄집어내는 지식인은 ‘지식 권력’을 말할 뿐입니다. 지난날 이 나라는 한자문화권이 아니었습니다. 한글문화권도 아니었습니다. 99퍼센트가 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꾼 터와 누리던 삶을 돌아보면 ‘숲살림’입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적혔기에 ‘우리 문화’이지 않아요.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옮기며 퍼지니 문화입니다. 아름드리숲처럼 아름찬 살림이 흐르고 이어 오늘에 이르지 싶어요. 굴레나 틀이 아닌, 스스로 빛나는 살림살이를 손수 짓는 마음으로 글을 어루만져야 비로소 아름책으로 묶을 아름글이 태어나지 싶습니다.


보수동 헌책집 〈대영서점(새동화서점)〉에 깃들어 혼자 생각에 잠깁니다. 저는 살림글을 쓰고 싶으며, 살림책을 읽고 싶습니다. 살림빛이 될 길을 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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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인생론》(L.톨스토이/황문수 옮김, 삼중당, 1975)

《교양도서해제 및 도서관 이용안내》(중앙대학교 도서관, 1971)

《영어로 글 잘 짓는 법》(윌렴 스트렁크 2세·이 비 화이트,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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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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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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