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살림밭 사랑밭 노래밭 (2020.6.8.)


― 부산 〈글밭〉

부산 연제구 안연로 12



  부산지방법원을 찾아왔습니다. 고흥에 있는 들풀모임 ‘청정고흥연대’ 분들이 부산항공청에 대고 ‘고흥만 경비행기시험장 취소 소송’을 했는데, 6월 18일 1심 판결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기에 이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푸른시골에서 무인군사드론을 마구 띄우며 실험하는 이 나라인데요, 푸른흙살림하고 동떨어진 이런 일을 고흥군청이며 정부이며 왜 그만둘 생각을 안 하는지 안쓰럽습니다. 시골사람 목소리를 법원 앞에서 외치고서 저는 따로 부산에 남습니다. 54 시내버스를 타고 연산동에 자리한 헌책집 〈글밭〉을 찾아갑니다. ‘밭’이라는 이름은 책을 다루는 곳에 참 어울린다고 느껴요. 씨앗을 심어 남새를 얻는 흙밭처럼, 이야기라는 숨결을 심어 슬기롭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가꾸는 책밭일 터이니 〈글밭〉이라는 곳은 이러한 손길이 만나는 자리일 테지요.


  시내버스에서 내립니다. 큰길은 내키지 않아 마을길을 걷습니다. 해바라기를 하며 책터를 어림합니다. 해가 잘 드는 자리에 찻집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책집이 있습니다. 책집 옆에 찻집, 찻집 옆에 책집. 사이좋게 나아가는 두 곳일 테지요. 책집하고 책집 옆에 또 어떤 집이 나란히 있으면 좋을까요. 마을이기에 커다란 가게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동무하는 가게가 되고, 이웃하는 살림이 되면서, 함께 노래하는 길이면 아름답겠다고 생각해요.


  아마 1945년부터 나왔지 싶은 잡지일 텐데, 《主婦の生活》 1977년 9월호를 봅니다. 일본에서 오래도록 나오는 “주부의 생활”을 고스란히 따라하며 한국에서 “주부생활”이란 잡지가 나왔지요. 묵은 일본 잡지를 들추는데, 손수 짓는 밥살림·옷살림·집살림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잡지를 무릎에 얹고서 생각합니다. 밥이며 옷이며 집을 가꾸는 손길을 사내랑 가시내가 함께 배우고 가르치고 키우면서 북돋울 적에 멋지면서 알차리라 느껴요. 그러니까 “주부의 생활”이 아닌 “살림짓기”나 “살림꽃”이 될 노릇이요, “살림빛”이나 “살림지기”나 “살림벗”으로 나아간다면 무척 값지리라 생각합니다.


  안쪽 책꽂이에서 《韓國人의 手決》(정병완 엮음, 아세아문화사, 1987)을 봅니다. 글을 쓰는 살림은 예부터 손으로 가꾸었습니다. 이제는 셈틀이나 손전화로 글을 ‘치는’ 사람이 많지만, 참말로 오래오래 모든 글은 손글이었고 손글씨였어요. 저마다 다른 사람이 저마다 다른 글빛으로 생각을 나누고 갈무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모든 공사문서에 고유한 여러가지 모습의 변천과정을 갖는 수결이 필수요건으로 사용되어 왔었다. (3쪽)


  오늘 우리는 저마다 다른 눈빛으로 저마다 다른 살림을 지으면서 저마다 싱그러운 사랑꽃을 피우는 길을 가겠지요. 달력종이로 책을 싼 자취를 보고는 《그로잉 업》(보어즈 데이비드슨/강문영 옮김, 대일서관, 1983)을 집습니다. 이 책을 장만할 뜻은 없으나, 겉을 싼 달력종이가 애틋하기에 집어요. 1983년 책을 감싼 달력종이란 바로 그해 어느 달 달력이었겠지요. 책을 안 사고 ‘달력종이 책싸개’만 살까 하고 생각하다가 알맹이도 있어야 어느 해 달력종이인지를 어림하리라 여겨 통째로 고릅니다.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3》(박세길, 돌베개, 1992)을 봅니다. 오늘 이곳 〈글밭〉에는 ‘다현사’ 석 자락이 다 있습니다만, 석걸음 하나만 고릅니다.1988년에 첫걸음이 나오는데, 그때까지 교과서로 하나도 안 다룬 발자취를 비로소 다룬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수부대의 광주 퇴각 이후 전두환 일파는 광주를 다방면에서 고립시키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우선 전두환 일파는 그들이 완전히 장악한 언론을 동원해, 일반 민중이 광주의 상황을 바로 이해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광주시민과 민중들 사이의 심리적 분열을 조장했다. (60쪽)


  헌책집 〈글밭〉은 글로 일구는 밭을 책으로 만나도록 잇는 다리이지 싶습니다. 책을 읽기에 책밭을 누리고, 글을 쓰기에 글밭을 가꾸며, 아이를 돌보는 살림을 건사하며 살림밭을 어루만져요.

  텃밭도 남새밭도 꽃밭도 좋지요. 이 곁에 사랑밭이며 노래밭이며 웃음밭이며 이야기밭이 나란히 있으면 더없이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별밭이 되고 어진밭에 상냥밭에 참밭이 된다면 그지없이 아름다울 테고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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