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어디에서든 만나요 (2015.10.15.)
― 서울 용산 〈뿌리서점〉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21길 25, 지하
02.797.4459.
여기에 이 책이 있습니다. 이 손을 가만히 뻗어서 이쪽을 넘기면 이리로 흘러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조그마한 숲을 함께 알아보시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조용히 눈을 뜨는 수수한 숲밭으로 같이 찾아가시겠습니까. 어릴 적부터 누구를 만날 적에 으레 “책집 앞에서” 보자고 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인천에서는 〈대한서림〉 앞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가서는 곳곳에 있는 다 다른 헌책집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책집 앞에서 만나자고 할 적에 으레 ‘새책집’을, 더구나 교보나 영풍처럼 커다란 책집을 생각하기 일쑤일 테지만, 크기도 작고 마을 한켠에 깃든 헌책집에서 만나자고 하면 으레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어떻게 찾아가야 하느냐고 물으시지요.
요새야 손전화로 길그림을 척척 찍지만, 손전화마저 없던 무렵에는 전철나루나 큰가게를 바탕으로 몇 미터쯤 된다고 또박또박 알려주었어요. 굳이 이웃이나 동무를 “헌책집으로 들어와서 만나자”고 한 뜻이라면, 저랑 그곳에서 만나는 때가 아니면 헌책집이란 곳을 눈여겨보지도 않고 찾아가지도 않거든요. 거의 처음으로 헌책집을 만나는 셈인 터라, 이 헌책집이 이 마을에서 여태 얼마나 사랑스레 책사랑을 둘레에 폈는가를 들려주고, 어느 책꽂이에서 어떤 책을 찾아내는가를 알려주면서 헌책 서너 자락쯤 불쑥 내밉니다. “겉보기로도 멀쩡하고 알맹이는 더더욱 새로운 이야기숲입니다.” 하는 말을 보태면서.
고흥에서 서울 용산 〈뿌리서점〉을 찾아가려면, 고흥서 순천으로 간 다음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서 내리는 길이 가장 수월합니다. 또는 고흥으로 돌아가는 길을 기차를 타기로 마음먹고서 서울마실을 마칠 즈음 용산에 들르면 되어요. 아무튼 시골에서 책집마실은 멀기도 멀면서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돌아갈 버스나 기차를 때맞추어 타야 하거든요. “한 해 만에 오셨나? 그런데 와서 인사를 할라니 바로 가셔야 하네? 하긴, 전라남도 끝에 있는 고흥이면 멀기도 멀지. 충청도 정도면 그날 서울 왔다가 그날 돌아갈 수도 있지만, 고흥은 그렇게 안 되겠지?” 〈뿌리〉 아저씨가 건네는 커피를 마시면서 고른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Roald Dahl, puffin books, 1964/1998)에 《the Witches》(Roald Dahl, a trumpet club special edition, 1983)에 《Walden : or, life in the woods》(Henri David Thoreau, dover pub, 1995)를 셈대에 올립니다. 《실리이만 트로이 발굴기》(브레이머/유원 옮김, 동서문화사, 1976)도, 《dtv junior Lexikon : Band 1 A-Box》(Deutscher Taschenbuch Verlag, 1974) 같은 사전도, 《happy times togerther》(jo england, happy books, 2004)랑 《Yemen》(bernard gerard, delroisse, 1973?) 같은 사진책도 올립니다. 예멘에 다녀온 사람이 가지고 온 예멘 사진책은 새삼스럽습니다. 오늘날은 이웃나라 모습을 사진으로 쉽게 찾아봅니다만, 1990년대 첫무렵에 이르도록 이 같은 사진책으로 살짝살짝 엿보았어요. 이웃나라에 다녀오는 분들은 곧잘 그 나라 사진책을 장만했달까요.
이제 이러한 사진책은 묵은 사진책이 되겠지만, 거꾸로 그 나라 예전 살림살이를 들여다보는 새삼스러운 사진자취가 됩니다. 《the joy of photography》(Eastman Kodak com, 1979)를 더 고릅니다. 사진을 찍는 기쁨을 다루는 사진책을 필름회사에서 선보였어요. 여러모로 알찹니다. 아무렴, 필름회사에서 선보이는 “사진 찍는 기쁨”이란 사진책이라면 매우 품을 들여서 엮겠지요.
오늘 우리는 어떤 기쁨을 노래할 만할까요. 나라나 지자체는 저마다 어떤 기쁨을 책으로 여미어 볼까요. 이를테면 고흥군청은 “고흥에 사는 기쁨” 같은 글책이나 사진책을 여미려고 돈이며 품을 들이거나 생각을 기울일까요? 글쎄. 그럴듯해 보이는 겉치레 글이나 사진이 아닌, 스스럼없이 수수하게 하루를 짓는 살림을 노래하는 이야기책을 짓는 길을 나라이며 지자체이며 꾸준히 한다면, 책살림을 넘어 숲살림이며 마을살림을 새롭게 북돋울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미리 끊은 표에 맞추어 책집을 나서야 합니다. 〈뿌리〉 아저씨는 못내 서운합니다. “사람들이 책방으로 안 오고, 다 인터넷으로 가더라고. 아무래도 인터넷이 편하겠지?” “인터넷으로 시키면 집으로 척척 갖다 주니까 수월하겠지요. 그런데 말예요, 인터넷으로 책을 사더라도 이모저모 살피고 값을 치르고 하다 보면 꽤 품이며 말미가 들어요. 두고두고 읽을 만한가 아닌가를 가려서 사자면 두 다리로 책집에 찾아오든 누리책집에서 살피든 매한가지예요. 바빠서 이 책 저 책 찬찬히 가릴 틈을 내지 않는다면, 광고삯을 대어 잘 보이는 데에 척 올려놓은 책을 그냥그냥 사서 읽겠지요.” “인터넷으로 책을 사는 데도 시간이 걸리나?” “책집에 와서 살피면 이모저모 살피잖아요. 인터넷에는 미리보기가 있지만 그저 맛보기일 뿐, 그 책이 막상 우리한테 맞거나 이바지를 할 만한가를 제대로 알아보는 징검다리가 되지는 않아요. 책을 제대로 사려 한다면 책집에 가서 만지고 살피고 읽은 뒤에 사야 오래도록 건사하면서 되읽는 아름책이 되겠지요.” “다들 인터넷으로 책을 사니까 우리도 인터넷을 해야 하나 걱정이야.” “예전에 따님이 인터넷으로 책을 올려 보자고 할 적에는 안 하시겠다고 호통을 치셨잖아요.” “허허, 그때에는 그랬지. 그런데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 …….”
어디에서든 만나는 책입니다. 헌책집에서도 새책집에서도, 마을책집에서도 큰책집에서도 만납니다. 종이꾸러미에서도 만나고, 나뭇잎이며 풀잎이며 꽃잎에서도 만납니다. 나비 날갯짓이며 멧새 날갯짓에서도 만나지요. 바람 한 줄기가 책이고, 구름 한 조각이 책입니다. 모든 살림살이가 책입니다. 부엌칼도 도마도 수저도 책이요, 아이들 말소리에 웃음짓 모두 책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