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보자기 파랑새 사과문고 91
윤소희 지음, 홍선주 그림 / 파랑새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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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린이책

맑은책시렁 229


《붉은 보자기》

 윤소희 글

 홍선주 그림

 파랑새

 2019.9.27.



김부흥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자신의 기록에 대해 짐짓 놀랐으나 이득원처럼 흥분하지는 않았다. 이득원은 함께 하대업을 찾아가 사초 수정을 청탁하자고 김부흥을 설득했다. (46쪽)


“사초를 쓴 것이 네놈이냐?” 그제야 하대업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황송하오나, 전하께서는 어찌 열람이 금지된 사초를 보신 것이옵니까?” (56쪽)


‘사초를 내가 다 읽어 두었더라면, 이 머릿속이 이야기책들로만 꽉 차 있을 게 아니라 아버지의 사초 내용으로 꽉 찼더라면, 그깟 종이 뭉치 좀 없어진들 뭐가 걱정이겠는가. 잃어버리면 다시 쓰고, 빼앗아 가도 다시 쓰고, 불타 버려도 다시 쓰면 그만인 것을.’ (147쪽)


궁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잔혹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아버지는 함부로 비난하지 않았고, 애잔함과 비통함을 금치 못하며 써 내려갔다. 나쁜 짓을 일삼는 탐관오리들에 대해서도 그 탁하고 탐욕적인 마음의 가난함을 먼저 헤아렸다. 인덕이는 어째서 아버지가 그토록 목숨처럼 사초를 지켜야만 했는지 비로소 그 참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159쪽)


‘책쾌 아재, 아재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알게 될 거예요. 동휘야, 너희 아버지는 나쁜 탐관오리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165쪽)



  국민학교를 다니며 일기 숙제를 늘 해야 했는데, 그무렵 제가 쓴 일기에서 어머니나 아버지 이야기는 없다시피 합니다. 학교에서는 일기에 이 글을 쓴 사람 하루만 쓰라 했으니 고분고분 따른 셈인데요, 어머니나 아버지나 집안이나 마을 이야기도 바로 ‘글쓴이인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인 줄 스스로 미처 헤아리지 못한 탓이기도 하겠지요.


  날마다 신문이 나오고, 방송이며 유튜브에 온갖 이야기가 흐릅니다. 나라에는 국가기록원이 있어요. 으레 정치·사회·스포츠·문화예술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 가운데 여느 자리 수수한 사람들 이야기는 얼마나 될까요. 국가기록원은 1955년 어느 날 작은고장 어린이 일기를 건사한 적 있을까요. 1975년 어느 날 시골 어린이 일기를 건사하자는 생각을 한 적 있을까요.


  어린이문학 《붉은 보자기》(윤소희, 파랑새, 2019)는 ‘조선왕조실록’을 엮는 바탕이 되는 ‘사초’를 쓴 사람을 둘러싼 줄거리를 다룹니다. 사초를 쓰는 사람은 임금을 비롯해서 임금집이며 나라에서 흐르는 온갖 이야기를 곰곰이 보면서 고스란히 담아내는 몫을 한다지요. 감추고 싶거나 부끄러운 이야기라 하더라도 ‘사초를 쓰는 사람’은 이를 지우거나 감추거나 덜거나 손질하지 않으려고 애썼다지요.


  어린이문학 《붉은 보자기》는 ‘사초에 적힌 벼슬아치나 임금 자취’를 슬쩍 들여다본 벼슬아치하고 임금이 ‘사초를 쓴 사람’을 나무라거나 죽일 뿐 아니라 두멧시골로 내보내는 줄거리도 다룹니다. 스스로 했던 일을 감추고, 뭔가 잘못하거나 뒷자리에서 벌인 꿍꿍이는 모조리 지우도록 했다는 줄거리를 함께 다루는데요, 벼슬아치나 임금으로서 이들은 무엇이 부끄러웠을까요? 뭔가 잘못했던 일이나 꿍꿍셈이 부끄러울까요, 아니면 그무렵 이 나라를 이룬 수수한 사람들 살림살이를 제대로 모르면서 정치를 한 모습이 부끄러울까요?


  ‘어떻게 나라지기나 벼슬아치가 시시콜콜한 대목까지 다 알아야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나라지기나 벼슬아치가 시시콜콜한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을 모른다면 무슨 정책을 어떻게 펼까요? 셈틀이나 손전화가 없는 가난한 어린이나 푸름이도 제법 있는데, 다짜고짜 누리맞이를 하면 가난한 아이들은 어리둥절하겠지요. ‘저소득계층·차상위계층’이란 이름이 아닌 ‘이웃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 어떤 살림살이인가를 나라지기나 벼슬아치가 스스로 챙겨서 살피지 않는다면, 제대로 나라살림을 알차게 가꾸는 길을 안 가거나 못 가겠지요.


  대통령뿐 아니라 시장·군수이며 읍면동사무소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큰기업 꼭두머리도 만날 수 있겠지만, 작고 낮은 자리에서 수수하게 하루를 짓는 사람도 언제나 만날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붓’이라면 정치·사회·스포츠·문화예술이라는 갈래만 다룰 노릇이 아닌, 신문사나 방송사 곁에 있는 작고 낮은 사람들 살림살이를 나란히 지켜보고 어깨동무하면서 담아낼 줄 알아야지 싶습니다.


  어린이문학 《붉은 보자기》에 나오는 ‘사초를 쓴 어른’은 임금하고 벼슬아치를 둘러싼 이야기를 아로새겼다면, 이 집안 딸아이는 어떤 이야기를 새로 쓸 만할까요. 구태여 임금이나 벼슬아치 이야기를 더 써야 할까요, 아니면 두멧시골이며 이 나라 골골샅샅에서 수수하게 삶을 짓고 사랑을 꽃피우는 이웃들 이야기를 처음으로 제대로 쓰는 붓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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