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어두운 골목을 품는 (2018.3.30.)
― 도쿄 진보초 ARATAMA
해가 떨어지고 밤빛이 무르익을 즈음 책집골목은 하나둘 불을 끄고 자리를 걷습니다. 진보초 책집골목에서는 거의 모두 저녁 일곱 시면 자리를 걷는 줄 알기에, 이제 길손집으로 가서 조용히 하루를 마감하고 이튿날 새벽처럼 일어나서 돌아다니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녁 일곱 시가 넘어도 자리를 걷지 않은 책집이 하나 보입니다. 〈ARATAMA〉라는 곳이고, 해가리개에 ‘total visual shop’이라 적습니다. 일본마실을 하면 짐수레에 담을 수 있는 무게만큼 사진책을 장만하려던 터라, ‘비주얼 숍’이라 적은 글씨에 끌립니다.
여닫이를 보니 20시까지 가게를 지킨다고 밝힙니다. 고맙군요. 여닫이를 열고 들어가는 안쪽보다 길가에 내놓은 책꽂이에 둔 책은 눅은 값이기 마련입니다. 먼저 길가 책꽂이를 돌아봅니다. 먼저 《朝鮮民族》(山本將文, 新潮社, 1998)을 봅니다. 저한테 한 자락 있는 사진책이지만 몹시 반갑습니다. 야마모토 마사후미(山本將文) 님은 어느 날 문득 역사를 돌아보다가 일본이란 나라가 한국한테 저지른 일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해요. 어린이하고 푸름이로서 학교에 다닐 적에는 거의 몰랐다 싶은 이야기를 스스로 찾아서 배운 다음에, 한국이란 나라에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혼자서 한국말을 익혔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서 먼저 일본, 이다음으로는 북녘·남녘으로, 이윽고 중국 연변하고 러시아 사할린, 여기에 중앙아시아까지, 두루 다니면서 ‘한겨레’가 ‘오늘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담아내려고 했답니다.
딱히 사진님이란 이름이 없는 수수한 일본사람 야마모토 마사후미 님인 터라, 이녁을 알아보는 일본 사진밭이나 한국 사진밭은 없다시피 합니다. 이녁이 선보인 사진책 몇 가지는 일찌감치 판이 끊어졌기에 둘레에 알려주기도 어려워요. 일본 아마존에서도 이녁 사진책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朝鮮民族》은 더없이 고마운 사진책입니다. 마침 이튿날 〈책거리〉에서 일본 이웃한테 한국말사전을 놓고 이야기꽃을 펴기로 한 만큼, 〈책거리〉에 이 사진책을 오래도록 빌려주자고 생각합니다. 저한테 이 사진책이 한 자락 없었다면 한국으로 들고 돌아가겠지만, 한 자락 있으니 값은 제가 치르고서 한 열 해쯤 빌려주고 싶어요.
처음 만난 책부터 설레니 다음에 만날 책이 궁금합니다. 다음으로는 《アジア祈りの風光》(中塚裕, 裕林社, 1989)을 봅니다. 일본으로 마실했기에 만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人間國寶 三輪休雪》(下瀨信雄, 朝日カルチャ-センタ-, 1986)이란 책도 돋보입니다. 일본에서는 ‘인간국보’란 말을 쓰는구나 싶어요. 한국에서는 예용해 님이 1960년대 첫무렵부터 ‘인간문화재’란 말을 지어서 쓰면서 퍼뜨려 주었지요.
사람이 빛나는 숨결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사랑이란 뜻입니다. ‘국보·문화재’ 같은 이름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을 쓰는 곁에 ‘사람빛’이나 ‘사람숲’ 같은 이름을 나란히 쓰고 싶어요.
바깥에 이런 세 가지 책을 놓은 〈ARATAMA〉는 속에 어떤 책을 품었을까요? 드디어 여닫이를 열고서 들어갑니다. 아, 그런데 〈ARATAMA〉 안쪽에 놓은 책은 ‘아가씨 헤엄옷’ 사진책하고 ‘여고생 학교옷’ 사진책하고 ‘아가씨 알몸’ 사진책으로 꽉 찼습니다.
‘토털 비주얼 숍’이란 이름을 보고서 ‘사진책’을 널리 다루겠구나 하고만 여겼을 뿐, 이러한 갈래 사진책을 다루는 줄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얼결에 들어왔으나, 바깥에서 고른 책 셋이 있기에 일본말로 주섬주섬 “이곳에서 책을 살피면서 사진을 찍어도 되겠습니까?” 하고 여쭙니다. 바깥에서 고른 책도 보여줍니다. 책집지기는 얼마든지 찍어도 좋되, 일꾼 모습은 찍지 않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다른 책집은 모두 닫았으니 20시까지 이곳에 머물며 사진을 찍습니다. 책집일꾼이 “2층에도 사진책 많으니 올라가서 더 찍어도 좋다”고 알려줍니다. 아마 2층은 1층보다 대단하겠지요. 그래도 오늘은 1층에서만 돌아보고 싶습니다. 어제부터 밤을 새서 이제 막 일본에 닿아 대단히 졸립기도 하고, 몇 군데 책집을 돌며 장만한 책이 있어 어깨가 결리기도 합니다.
아가씨 사진책도 사진책입니다. 어느 갈래 사진이든 사진입니다. ‘토털 비주얼 숍’이란 곳은 처음 들어와 봅니다만, 일본이란 나라에서 나오는 ‘아가씨 사진책’은 사진결이 매우 훌륭하구나 싶습니다. 그냥 찍는 사진은 없어요. 빛이며 결이며 그림자이며, 또 ‘사람 눈빛이며 얼굴이며 몸을 바라보는 길’이며, 빈틈이 없을 뿐 아니라 아름답구나 싶어요. 한국이란 나라에 이처럼 깊고 넓으며 포근하게 무지갯빛을 어루만지면서 사진을 찍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이른바 ‘기성작가’나 ‘유명작가’나 ‘원로작가’ 가운데 일본에서 ‘아가씨 사진책’을 찍는 사람하고 어깨를 견줄 만큼 사진빛을 선보이는 분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없다고 말해야 옳겠지요. 자존심을 앞세울 일이 아니라, 오늘 이 모습, 이 빛을 볼 노릇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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