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펴내는 '동화읽는 어른'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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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이야기꽃

여덟걸음 ― ‘해보기’ 너머 ‘숲’으로



  둘레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수첩에 적습니다. 어쩐지 머리나 마음으로 스미지 못하는구나 싶은 말을 한참 바라봅니다. 이 말을 쓰신 분으로서는 이 말이 그분 생각을 나타내는 길에 어울린다고 여겼을 테지만, 저는 제가 쓸 말을 곱씹습니다. ‘방향전환’이란 말 한 마디를 수첩에 옮겨적고 보니 ‘뜯어고치다’를 나타내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살짝 눈을 감고 생각을 잇습니다. ‘뜯어고치다’란 낱말 하나가 어떤 이야기를 담는가를 헤아리면서 화살표를 넣고서 다른 말을 줄줄이 붙여 봅니다.


뜯어고치다 ← 혁명, 혁신, 변혁, 개혁, 리빌딩, 개보수, 재건축, 개과천선, 방향전환


  그냥그냥 ‘방향전환’ 같은 말씨를 써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둘레에서 이런 말을 흔히 쓰면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그러나 으레 스스로 묻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제가 여덟 살이나 열 살 어린이라 한다면, 둘레에서 쓰는 이런 말을 알아듣겠느냐고 묻습니다. 이다음으로 혀짤배기에 말더듬이 어린이가 이런 말을 혀에 얹어 소리를 내기 좋으려나 하고 묻습니다.


  저는 혀짤배기로 태어났고, 소리가 자꾸 새서 말더듬이로 어린 나날을 보냈습니다. 둘레 다른 분들이 아무렇지 않게 소리를 내는 말씨라 하더라도, 저로서는 모두 걸러내야 했습니다. 어릴 적에 소리를 내기 힘든 말씨 가운데 하나는 ‘우리나라·우리말’이었습니다. 어쩐지 ‘우리’가 들어가는 모든 말씨가 어렵고 소리가 샜고, 뒷말하고 안 이어져서 더듬더듬했어요. ‘우리’를 비롯해 ‘고리·뿌리·나리·소리·머리’처럼 ‘ㄹ’이 첫머리에 깃든 ‘리’란 말씨는 엄청난 담이더군요.


  이 담을 넘으려고 스무 해쯤 씨름을 했어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사람이 아무도 없다 싶은 외지거나 깊은 곳에 가서 큰소리로 혼자 외치면서 노래를 했어요. 적어도 하루에 두어 시간쯤. 누가 시켜서 하지 않았어요. 국민학교란 곳을 다니는 동안 소리가 새어 말더듬질을 할 적에 늘 놀림을 받고 괴롭힘질을 받은 터라, 살아남으려고 악을 썼을 뿐입니다.


길 ← 차도, 보도(步道), -가(街), 도로, 차로, 방법, 법, 방안, 방도, 수단, 대안, 대책, 방도, 노정, 노상, 기회, 여정, 도중, 지평, 도구, 지식, 루트, 루틴, 로드, 경로, 통로, 방식, 세대(世代), 과정, 교통, 노선, 선로, 행로, 행보, 행적, 목적, 목적의식, 목표, 정책, 이치, 원리, 레이스, 가도(街道), 가로(街路), 가두, 차례, 비전(vision), 진출, 선택, 선택지, 비결, 비방(秘方), 노하우, 키, 해결책, 해결 방안, 해결 대책, 묘수, 묘책, 돌파구, 캐치프레이즈, 습관, 공식(公式), 아이콘, 여행, 순리, 답(答), 해답, 처세, 처세술, 방면, 방향, 모델, 복(福), 제도(制度), 창구, 도상(途上), 궤도, 궤적, 사이클, 지리, 지형, 측면, 타운(town), 측(側), 운명(運命), 운(運), 운수(運數), 지표


  한국말사전이란 책을 쓰기에 늘 말을 헤아리기도 하지만, 저 스스로 혀에 얹을 만한 말씨인가 하고 살펴야 하기에 언제나 말을 헤아립니다. 어느덧 마흔 몇 해를 살아낸 몸이기에 이 걸음을 되새기면서 ‘길’이란 무엇일까 하고, 이 ‘길’은 얼마나 너른 품인 낱말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저는 그저 ‘길’ 한 마디만 쓰는데, 둘레에서는 갖가지 말을 잔뜩 써요.


  자리마다 다르게 쓸 수 있습니다. 여러 말을 쓴대서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 궁금하더군요. 왜 ‘길’ 한 마디이면 안 될까요? ‘길’이란 낱말 하나가 얼마나 넓고 깊은가를 하나하나 또렷하게 밝혀서 어린이한테 들려주고 어른 스스로 새롭게 바라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이 ‘길’로 깊이 생각(철학)을 할 수 있어요.


  숱한 한자말이나 영어를 ‘길’로 고쳐쓰자는 뜻이 아닙니다. 아주 수수하면서 쉽고, 또 소리를 내기에도 부드러운 ‘길’이란 낱말이 있다면, 이 낱말에 얽힌 수수께끼를 즐겁게 풀어내면서 새롭게 이야기를 지을 만하지 싶습니다.


시골 들길을 걷는 사람이 없어지고 들바람을 쐬면서 노는 아이도 어른도 사라진 자리에는 기계가 울리는 소리만 가득할 뿐, 들일꾼이 부르는 들노래는 없습니다. 집집마다 텔레비전을 두면서 대중노래를 듣지만, 마을이 어우러져서 부르는 마을노래와 일노래와 놀이노래는 자취를 감춥니다.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68쪽


  1982년이란 해에 국민학교에 들어간 터라, 그즈음 대통령이 된 분이 나라 곳곳에 세운 커다란 돌을 흔히 보았어요. 이 가운데 제가 늘 봐야 했던 큰돌 글씨는 “하면 된다”예요. 그러나 뭘 하면 되는지, 하면 어떻게 되는지, 해서 되면 뭐가 달라지는지 알 길이 없더군요. 그무렵 어른들은 새마을이란 바람을 타고서 “하면 된다”는 말을 윽박지르기에 바빴다고만 느낍니다.


  대중노래가 확확 퍼졌고, 프로야구에 프로축구에 프로씨름에 프로배구에 ‘프로’란 이름을 내세운 운동경기가 넘쳤습니다. 동무끼리 골목이며 마을에서 스스로 지어서 부르던 놀이노래는 어느덧 구닥다리로 여기면서, 대중노래하고 프로스포츠에 사로잡히는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어린 날을 되새기면서 앞뒤 모두 빠졌지 싶은 “하면 된다”란 말에 하나씩 살을 입혀 봅니다. “해보면(하면서 보면) 된다”로, “꿈대로 해보면 된다”로, “꿈꾸는 길대로 해보면 된다”로, “이루고 싶은 꿈길대로 생각해 보면 된다”로, “사랑으로 이루고 싶은 꿈길을 가는 대로 된다”로, “사랑스레 살림을 짓는 꿈길대로 해보면 된다”로, “사랑스레 살림을 짓는 숲에서 슬기로운 사람으로 살면서 해보면 된다”로, “어깨동무하는 즐거운 사랑으로 살림을 짓는 숲에서 슬기로운 사람으로 보금자리를 가꾸면서 해보면 된다”로, 말 한 마디씩 보태면서 마음에 씨앗을 심습니다.


  놀림받던 혀짤배기는 이 혀짤배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말을 스스로 찾는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대학교를 그만두는 길에서 스스로 살림을 세우는 하루를 찾기로 했습니다. 군대에서 의문사를 여럿 지켜보고 살아남으면서 주먹질이 낳는 길을 새삼 돌아봤습니다. 서울·인천에서 사는 동안 집삯을 다달이 대는 길이 목을 얼마나 죄는가를 뼛속까지 느꼈습니다. 시골로 삶터를 옮겨 아이 둘을 돌보는 동안 손으로 빚는 살림길이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인가를 몸으로 새겼습니다.


해보다 ← 시도, 도전, 시험, 조치, 대처, 처리, 시범, 연습, 시행, 액션, 실천, 실행, 몰두, 활동, 실습, 경험, 체험


  여느 사전에는 아직 ‘시도’를 가리키는 ‘해보다’란 낱말이 없습니다. 둘레 많은 분들이 입말로 ‘해보다’를 꽤 오래 익히 쓰는데, 이웃들이 쓰는 ‘해보다’가 어떤 뜻이나 결인가를 하나씩 짚고 보니 꽤 재미있어요. ‘해보다’를 새말 한 마디로 삼아서 쓸 만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새롭게 가고 싶은 삶길 얼거리를 펼쳐 본다면 이렇습니다. 보다(구경) → 하다(몸짓) → 해보다(겪다) → 맛보다(느낌) → 알다(배움) → 다시하다/새로하다/거듭하다(삶) → 익히다/깨닫다(마음) → 살림/철(보금자리) → 짓다(사랑) → 꿈(길) → 아이/씨앗(숲).


  갓 태어난 아기는 그저 지켜봅니다. 지켜보고 또 보고 자꾸 보다가 슬슬 움직입니다. 슬슬 움직이며 스스로 겪어요. 이러다가 하나씩 느끼고 어느덧 배워서 말을 터뜨립니다. 이다음에는 더 느끼고 더 배워서 더 많이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새 깨닫는 이야기가 생기고 마음을 다스려요. 이렇게 흐르고 보면 철이 드는 나이에 이르고 새로 보금자리를 내고는 사랑을 찾아 꿈을 이루면서 스스로 어른이나 어버이란 자리에 섭니다.


  혀짤배기 말더듬이 어린이는 놀림질이랑 괴롭힘질이랑 따돌림질에서 살아남으려고 싸우는 어린 날을 보냈지만, 혀짤배기하고 말더듬질을 스스로 풀어낸 뒤에는 이다음에 뭘 해야 하는가를 놓고 헤매다가, 사전쓰기라는 길을 보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숲길을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해보기였다면, 이제는 이 너머에서 새롭게 손을 잡을 수 있는, 또 스스로 푸르게 빛날 수 있는 숲을 노래하는 길을 아이들하고 걸어가자고 생각합니다. 해보고 또 해보는 하루보다는 사랑하고 거듭 사랑하며 바람이며 해님이며 빗방울이며 푸나무마냥 고요하면서 고운 사랑이 되는 길을 가려고 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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