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해걸음 (2019.10.8.)
― 서울 신촌 〈숨어있는 책〉
02.333.1041.
서울 마포구 신촌로12길 30
이틀이 멀다 하고 나들이하던 책집에 해걸음을 합니다. 해걸음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반가이 여길 노릇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전남 한켠에서 살림을 꾸리니 서울마실이 뜸하고, 뜸한 서울길에 해마다 하루쯤 걸음할 수 있다면, 더구나 해걸음을 하는 데에도 한 시간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서 부랴부랴 돌아나와야 하더라도, 이렇게 찾아갈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서울에 살며 날마다 책숲마실을 다닐 적에 만난 ‘날걸음(날마다 걸음하는)’ 책손 할배는 으레 “하루에 한 번도 모자라! 아침 낮 저녁, 이렇게 세 걸음은 해야 단골 책집이라고 말할 만하지!”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 군데 책집을 하루에 세걸음을 하기는 어려웠어요. 그도 그럴 까닭이 서울에만 해도 아름책집이라 할 곳이 1990년대 끝무렵하고 2000년대 첫무렵 사이만 하더라도 삼백∼오백 곳쯤 되었다고 느끼거든요. 하루에 한 곳씩 들르면 해걸음이 되는 셈이니, 하루에 세걸음을 하는 엄청난 단골 책집까지 두지는 못했어요. 이틀이나 사흘마다 찾아가는 책집을 여럿 두었을 뿐입니다.
어느덧 스무 해 책손이 된 〈숨어있는 책〉입니다. 새삼스럽지만 〈숨어있는 책〉이 처음 문을 열던 무렵이 애틋하게 떠오르고, 그날부터 뻔질나게 드나들던 일이 아련하게 생각나며, 충주로 인천으로 삶터를 옮기면서 차츰 발길이 뜸해야 했고, 전남으로 옮기며 그야말로 까마득하네 싶어, 이따금 사진을 넘기면서 ‘그때에는 이러했지’하고 되새기곤 합니다. 책집을 다닐 적마다 책집 삶자락을 바지런히 사진으로도 옮겨놓는데요, 그동안 찍은 사진이 누구보다 저 스스로한테 반가우면서 고맙구나 싶어요.
글하고 사진이 어우러진 《look at us, etc, etc》(William Saroyan 글·Arthur Rothstein 사진, Cowles book, 1967)를 봅니다. 통통 튀는 글에 수수한 미국사람 살림살이가 묻어나는 사진이 함께 있습니다. 펴낸해를 다시 들춥니다. 1967년. 우리한테 1967년은 이만 한 책은 어림조차 못하던 나날이었구나 싶으면서, 그 뒤 쉰 해 남짓 흐르는 사이 우리 글살림·사진살림은 얼마나 발돋움했으려나 궁금합니다.
전남에 살기에 눈에 꽂히는 《한국 지명 총람 14 전남편 2》(한글학회, 1982)하고 《한국 지명 총람 15 전남편 3》(한글학회, 1983)을 만납니다. ‘전남편 2’은 예전에 장만했고, ‘전남편 1’가 아직 없습니다. 비록 ‘전남편 2’은 예전에 갖추었더라도 이 나라 땅이름을 하나로 그러모은 놀라운 꾸러미이기에 한 자락 더 갖추자고 생각합니다. 남녘을 골골샅샅 누비며 땅이름을 그러모은 이 꾸러미는 참 대단하지요. 오늘날처럼 셈틀을 놓고서 갈무리한 꾸러미가 아니라 맨손으로 일궈낸 열매이기까지 하거든요. 더구나 지난날에는 길그림만 보고서 골골샅샅 누볐으니, 또 길그림에 안 나온 데도 많았으니, 다리품을 어마어마하게 팔아야 여밀 수 있던 꾸러미입니다.
손바닥책으로 나온 《ブッダ 12》(手塚治蟲, 潮出版社, 1993)를 봅니다. 짝이 안 맞기에 하나만 고릅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이 빚은 《붓다》를 일본에서는 이렇게 앙증맞게도 펴내었네요. 일본이 책살림이 남달리 앞선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한국은 뻥튀기가 너무해요. 단출하면서 가볍고 값싸게 널리 읽도록 책꼴을 여미는 일을 제대로 하는 ‘큰 출판사’는 아직 하나도 없거든요.
어린이를 사진으로 어떻게 담아낼 만한가를 멋지게 담아낸 《complete course in photographing children》(John Hedgecoe, Simon & Schuster, 1980)을 봅니다. 오늘 만난 이 사진책은 책싸개도 대단합니다. 미국 어느 도서관에서 나온 책인데, 도서관에서 쓴 싸개는 책을 그야말로 곱게 건사하는 구실을 합니다. 어쩜 이렇게 세 겹짜리 책싸개로 책을 돌보는 손길이었을까요. 한국에서 도서관지기로 일하는 분이라면 ‘도서관 책싸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매무새를 미국 도서관에서 배워야겠다고 느낍니다. 미국은 공공도서관이나 학교도서관뿐 아니라 군대도서관도 책을 알뜰히 다룰 줄 안다고 느껴요. 미국 도서관을 둘러본 일은 아직 없습니다만, 미국 도서관에 있다가 한국 헌책집으로 흘러나온 책은 수두룩하게 보았어요.
언제 되읽어도 가슴을 찌릿찌릿 울리는 《마지막 인디언》(디오도러 크로버/김문해 옮김, 동서문화사, 1982)을 새삼스레 봅니다. 푸름이가 읽을 문학을 꾸준히 내는 몇몇 출판사에 이 아름다운 문학을 되살리면 어떻겠느냐고, 헌책집에서 이 책을 찾아내어 보낸 적이 있습니다만, 어느 출판사에서도 이 책을 되살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오래된 글이라 여길 수 있고, 그분들이 보기에 마음에 안 찰 수 있겠지요. 북미 텃겨레 가운데 미국 군홧발에 사라져야 했던 어느 겨레 마지막 살림살이 이야기를 눈물겨우면서도 아리땁게 담아낸 《마지막 인디언》이라고 느낍니다.
투시는 ‘푸른 동굴’에서 이시가 가져다 만들어 준 파란 꽃무늬 구슬을 단 조가비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머리카락을 묶은 밍크 힘줄에 딱다구리의 빨강 깃털을 꽂았다. 스커트에도 콩꼬투리와 조가비 장식이 달려서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났다. (41쪽)
이제 책을 그만 고르고 자리를 옮겨야 합니다. 이튿날 한글날을 맞이해서 가야 할 곳이 있어요. 그러나 1분이라도 쪼개어 골마루를 더 거닐고 싶습니다. 1초라도 틈을 짜내어 사진을 몇 칸이라도 더 찍고 싶습니다. 이러다가 ‘新 自然 きらきら’란 꾸러미로 나온 어린이 사진책 몇 자락을 만납니다.
《新 自然 きらきら 5 あまやどり》(久保秀一 사진·七尾 純 글, 偕成社, 2002)
《新 自然 きらきら 7 あおむしくん》(久保秀一 사진·七尾 純 글, 偕成社, 2002)
《新 自然 きらきら 9 かくれんば》(久保秀一 사진·七尾 純 글, 偕成社, 2002)
《新 自然 きらきら 10 なつのよる》(久保秀一 사진·七尾 純 글, 偕成社, 2003)
《新 自然 きらきら 11 コスモス さいた》(久保秀一 사진·七尾 純 글, 偕成社, 2003)
숲살림을 사진으로 곱게 여미어서 보여주는 책입니다. 일본에서는 진작부터 이런 어린이책이 숱하게 나왔습니다. 때로는 그림으로, 때로는 사진으로, 풀벌레부터 숲짐승에 바다벗까지 두루 담아내었지요.
일본에서 선보인 어린이 ‘숲살림 사진책’을 들여다볼 때면, 한국에서는 왜 어린이한테 이바지하는 이러한 사진길을 걸은 어른이 없었나 싶어 놀랍기만 합니다. 한국에서 사진길을 걷는 이들치고 예술을 한다고 우쭐거리는 이는 많아도, 어린이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사진을 찍는 마음을 선보이는 이는 찾아볼 길이 없어요. 아마 대학교 사진학과에서도 이 대목을 못 짚거나 안 건드릴 수 있습니다. 사진강좌에서도 이 대목을 짚거나 다루는 일도 없겠지요. 여러 지자체는 목돈을 들여서 무슨무슨 ‘사진 비엔날레’를 그럴듯하게 일으키곤 하지만, 막상 알맹이가 튼튼하거나 빛나 보이는 자리는 여태 없었다고 느낍니다.
예술이란 이름을 붙여야 예술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도 그림도 글도 모두 매한가지예요. 이름을 드높여야 이름이 퍼지지 않습니다. 수수한 사람들 살림자리에서 수사한 사랑을 스스로 길어올리는 길을 나아갈 적에 비로소 사진도 그림도 글도 환하게 빛나면서 가슴을 찌릿찌릿 울리면서 적시는 숨결이 된다고 느낍니다.
이제는 책집을 나서야 할 때입니다. 책값을 셈합니다. 〈숨어있는 책〉 책집지기님하고 마지막말을 나눕니다. “이제 올해에 얼굴 봤으니 올해에는 얼굴을 더 못 보나?” “그러게요. 10월이 되어서야 처음 얼굴을 보았네요. 해가 넘어가기 앞서 얼굴을 더 보면 좋을 텐데요.” “못 보면 어때. 다음해에는 또 볼 수 있잖아?” “아, 아, 아쉽다. 그러나 아쉽다 말아야지. 이렇게 올해에도 얼굴을 뵙고 책을 만날 수 있으니 고맙지요. 그러면, 아직 새해는 두 달 더 남았지만 미리 새해절을 할게요. 올해에도 새해에도 언제나 기쁘며 아름답게 이곳에서 하루 누리셔요. 고맙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