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


숲에서 짓는 글살림 

41. 봄샘



  봄을 앞둔 겨울은 추위가 모집니다. 봄이 다가오니 봄을 시샘한다고도 하지만, 아직 겨울이니 겨울답게 바람이 매섭고 날은 싸늘하겠지요. 봄을 시샘한다는 추위를 놓고 옛사람은 재미나게 말을 엮었습니다.


 꽃샘추위·잎샘추위


  봄을 시샘하는 날씨라면 ‘봄샘’이라 하면 될 텐데, 굳이 ‘꽃샘’하고 ‘잎샘’이라는 이름으로 지었어요. 이 대목을 도두보면 좋겠어요. 그만큼 이 나라 흙지기는 언제나 꽃을 바라보고 잎을 살펴보았다는 뜻이 흘러요. 언제나 꽃이며 잎을 돌보고 곁에 두면서 마음으로 품었구나 싶은 숨결을 느낄 만해요.


 꽃샘나이·봄샘나이


  꽃이며 잎을 샘내는 추위를 나타내는 낱말을 헤아리다가 문득 새말을 짓고 싶었습니다. 이리하여 ‘꽃샘나이·봄샘나이’를 엮었어요. 이 낱말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바로 ‘사춘기’입니다. 이제 봄처럼 피어나면서 무럭무럭 철이 들 즈음인 나이를 놓고 숱한 어른들은 아이들이 사납거나 날카롭거나 차갑다고들 말해요.


  여러모로 보면 ‘사춘기’라는 한자말 이름에는 푸르게 꽃피려는 숨결을 썩 안 좋게 보는 기운이 깃들지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춘기’라는 한자말 이름이 이 땅에 깃든 지 얼마 안 됩니다. 예전에는 ‘사춘기’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오늘날처럼 푸른 나이에 대학입시에 목을 매다는 판이 되고부터 바야흐로 사춘기가 불거지지요.


 꽃나이·봄나이


  한창 철이 들면서 푸르게 빛나려 하는 나이에 일어나는 차가운 바람을 ‘꽃샘나이’로 나타낸다면, ‘샘’을 덜고 ‘꽃나이’라 해보아도 어울립니다. 굳이 어린이·푸름이한테 ‘시샘’ 같은 말을 안 써도 되어요. 그저 꽃으로 피어나려고, 이제 새로운 봄을 맞이하려고, 망울을 맺는 푸나무처럼 마음망울을 맺는 모습을 그리면 참으로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꽃샘철·잎샘철


  여기서 한 가지 말을 더 지어 봅니다. ‘꽃샘철·잎샘철’인데요, 이 새말로는 어떤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만할까요? 고즈넉히 눈을 감고서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꽃을 샘하는 철에 이른 나이란, 잎을 시샘하듯 거칠게 구는 나이란, 바로 ‘반항기’입니다.


  ‘반항기’란 한자말 이름도 이 땅에 스며든 지 얼마 안 됩니다. 더구나 아이가 어른한테 대든다는 느낌이 너무 짙어요. 이런 말을 쓰면 막상 이무렵에 이른 어린이나 푸름이로서도, 또 이런 말을 읊을 어른으로서도, 서로 기쁠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말씨부터 가다듬어서 생각도 추슬러야지 싶어요.


 사광이풀·사광이아재비


  ‘며느리배꼽’이나 ‘며느리밑씻개’란 풀이름은 일본에서 스며들었습니다. 이 나라 흙지기가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일본에서 쓰던 이름을 한국 식물학자가 엉뚱하게 끼워맞춘 이름이지요. 며느리 살림하고 동떨어진 채 함부로 붙여서 퍼진 이런 풀이름을 이제는 바로잡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나 뜬금없는 이름으로 이 땅 풀꽃을 깎아내리고, 며느리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마저 업신여기는 길을 가야 할까요?


  ‘개불알풀꽃’이란 이름도 일본에서 쓰는 말을 억지로 꿰맞춘 풀이름입니다. 말느낌이 안 좋아서 안 쓸 풀이름이 아니라, 이 땅 흙지기 흙살림하고는 안 어울리기에 쓸 까닭이 없는 풀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름이 있느냐 하면 ‘봄까지꽃’입니다. ‘-까지’란 이름을 붙여서 재미있습니다. 한겨울이 이울며 낮이 차츰 길어질 즈음 비로소 새싹을 내미는 봄까지꽃은 한봄에 무르익다가 늦봄에 가뭇없이 사라져요. 5월로 접어들면 시들시들하고, 5월이 깊을 무렵 모조리 녹더군요. 그야말로 봄까지 피는 앙증맞은 쪽빛 풀꽃인 봄까지꽃이에요. ‘-까치’가 아닌 ‘-까지’를 붙이는 풀이름입니다.


 알갱이


  요즈음은 다들 ‘곡식’이라 하지만, 이 한자말이 들어오기 앞서는 ‘나락·낟알’이라든지 ‘알·씨알’이나 ‘씨앗·알맹이’란 낱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알갱이’를 썼어요. ‘-갱이’가 붙는 낱말로 ‘고갱이’가 있어요.


  ‘고갱이’는 줄줄기나 나무줄기에서 한복판을 자리하는 곳을 가리킵니다. 한자말로 하자면 ‘중심, 핵심, 근원, 본질, 중요, 골자’라 하겠지요. 그렇다면 ‘알갱이’란 낱말은 얼마나 더 깊으면서 너른 낱말일까요?


  ‘알 + 갱이’인 ‘알갱이’예요. ‘알맹이·알짜·알속·알차다’가 갈리고 ‘알뜰하다’가 갈리며, 이윽고 ‘알다·알리다’하고 ‘아름답다·아름드리’가 갈립니다.


  ‘알갱이’란 낱말은 쓰임새가 매우 넓습니다. ‘곡식, 물질, 입자, 정수, 결정, 과립’부터 ‘실속, 내실, 요지, 함량, 용적, 필요, 필수, 환, 실질’을 아우르는 낱말이에요. 그렇지만 이러한 오랜 텃말이 어떤 살림을 나타내고 어떻게 가지를 뻗으며 얼마나 우리 삶자락에 두루 깃드는가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자리가 아직 얕아요. 학교에 국어 수업은 있으나 말을 말답게 나누는 자리는 거의 없어요.


 하늘로


  하늘로 치솟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릅니다. 하늘을 뚫으려 합니다. 하늘을 찌르려 하지요. 이러한 자리에 ‘천정부지’란 한자말을 쓰는 분이 꽤 있더군요. 그런데요, ‘하늘로’ 한 마디여도 좋아요. 하늘을 둘러싼 여러 수수한 말을 쓰면 되어요. 그리고 ‘껑충’이나 ‘거침없이’나 ‘끝없이’나 ‘마구’나 ‘엄청나게’나 ‘무섭게’나 ‘어마어마하게’ 같은 말을 알맞게 쓸 만합니다.


  얼마 앞서 읍내 문방구에 가서 볼펜 ‘속’을 장만하는데요, ‘심(心)’이라는 말이 어쩐지 껄끄러워 “볼펜 ‘속’이 있을까요?” 하고 여쭈어서 ‘속’만 산 적 있어요. 곰곰이 생각하니 제가 어릴 적에는 할아버지 가운데 ‘연필 심’이라 안 하고 ‘연필 속’이라 말씀한 분이 제법 있었습니다. 한자말이야 ‘심지(心地)’일 텐데, 이런 말을 안 쓰고 ‘속·속대’라고들 하셨는데, 속이나 속대라 말씀한 분은 어릴 적부터 흙을 가까이하고 푸나무를 돌본 손길을 온몸에 새긴 어른이더군요.


  우리 집 아이들하고 연필이나 볼펜으로 글을 쓰면서 ‘속’이라는 낱말로 골라서 씁니다. 마음을 이야기할 적에도 ‘속’이라는 낱말을 즐겁게 씁니다. 속을 가꾸고 속을 돌보며 속을 바라봅니다. 껍데기 아닌 속알을 가다듬어 곱게 빛나는 길을 가자고 이야기해요.


  봄을 앞두면 봄샘바람이 불 만한데, ‘샘’이란 시샘하는 샘도 있지만, 맑고 알뜰히 흐르는 물줄기인 샘도 있어요. 봄날 봄꽃이 흐드러지는 봄골에 흐를 봄샘물을 두 손에 담아서 나누고 싶습니다. 철철철 흐르는 봄샘물로 봄빛을 흐벅지게 누릴 하루가 다가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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