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나즈막한 이야기를 담는 (2018.1.20.)

강원 춘천 〈경춘서점〉

.. 이곳은 2018년 겨울 언저리에 책집을 접고서 일식집으로 바뀌었습니다 ..



  춘천에 마을책집이 여럿 문을 열었습니다. 도청이 있고 교육대학이 있으며 여느 대학까지 있는 춘천이라면 곳곳에 책집이 들어설 만합니다. 이러한 춘천을 오래도록 책으로 빛낸 터로 〈명문서점〉하고 〈경춘서점〉 두 헌책집이 있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책은 새롭게 읽히고, 조용히 잠이 들다가 다시 읽히며, 찬찬히 또다른 손길을 받아서 새록새록 읽힙니다. 오늘을 새롭게 만나고, 어제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어제를 읽어 오늘에 살리고, 오늘을 읽어 어제에서 거듭난 새길을 익힙니다.


  지난날에는 마을에서 선보인 책을 마을헌책집에서 다루곤 했습니다. 서울이나 큰고장에 두루 넣는 책이 아닌, 마을이나 고장에서 조촐히 나누는 책은 새책집에 넣지 않거나 못했어요. 마을살림이나 마을이야기를 책으로 만나려면 헌책집에 가야 했는데, 이제 나라 곳곳 마을책집은 이처럼 작은 이야기를, 제 마을이며 고장 이야기를 살뜰히 품는 몫을 하고, 이웃 마을이며 고장에서 태어난 작은 이야기도 넉넉히 품습니다.


  고흥으로 터를 잡은 뒤 2014년에 처음 걸음한 〈경춘서점〉에 2018년에 새로 걸음합니다. 이곳을 2009년에 두 살인 큰아이를 안고서 처음 찾아왔으니 어느새 열 해가 흐릅니다. 책집 아주머니는 책집 할머니가 됩니다.


  바깥에 놓은 만화책을 먼저 둘러보는데 《드래곤 볼 3》(토리야마 아키라/아이큐점프 편집부 옮김, 서울문화사, 1993), 《드래곤 볼 6》(토리야마 아키라/아이큐점프 편집부 옮김, 서울문화사, 1993)이 보입니다. 이 만화책은 1990년에 비로소 저작권 계약을 맺어서 나왔습니다. 처음 나올 적에 형하고 살림돈을 푼푼이 모아서 1∼42에 이르는 책을 모두 장만했는데, 설이나 한가위에 찾아온 작은집 아이들이 하나둘 빌려가더니 그만 돌려주지 않아 이제 우리 집에는 처음 나온 이 만화책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들어갈 적에 교과서가 모두 바뀌었습니다. 바로 제 앞에서 바뀐 교과서인 《중학 국어 1-2》(한국교육개발원, 문교부, 1989), 《중학 국어 3-1》(한국교육개발원, 문교부, 1984), 《중학 도덕 1 상》(한국교육개발원, 문교부, 1982), 《MIDDLE SCHOOL ENGLISH BOOK 2》(한국교육개발원, 문교부, 1984)를 집어듭니다. 교과서에 적힌 말이 어떤 자취를 남기며 달라졌는가 하고 살피려고 챙깁니다. 죽 넘기다가 묵은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이런 말에 흠칫합니다. 1980년대 학교에서는 이렇게 푸름이를 길들이려 했군요.


우리는 자기의 권리를 침해당하고도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단념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가령, 폭력배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이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 폭력 행위를 더욱 도와주는 결과가 되고, 나아가 사회적 불의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권리의 주장과 그 행사는 사회적 불의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기의 책임과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어느 사회든지 그러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질서가 유지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권리와 안전이 보장될 수도 없다. (도덕 1 상/106∼107쪽)


  1980년대가 저물고 1990년대로 넘어서면서 셈틀이 퍼집니다. 타자기는 1990년대로 넘어서면서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최신 개정판 정규 학교 타자 교본》(한국타자교육협회, 유림문화사, 1985)을 보면서, 그야말로 타자기 끝물에 나온 상업고등학교 교재였네 하고 생각합니다. 《가정의례준칙》(대한민국 정부, 1969)이 있기에 들추는데, 1960년대가 얼마나 싸늘하며 매몰찼는가 하는 대목을 그무렵 우두머리 목소리로 엿볼 만합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국민이 한덩어리가 되어 조국근대화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읍니다. 그러니 먼저 생활의 합리화, 근대화가 이룩되지 않는한 이 과업수행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서 우리는 그동안 많은 국민들과 더불어 ‘가정의례준칙’의 제정과 그 실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왔던 것입니다. (머리말/대통령 박정희)


  예전에 박정희란 이는 ‘근대화’란 말을, 전두환이란 이는 ‘현대화’를, 김영삼이란 이는 ‘세계화’를 들먹였습니다. 나라지기란 일을 맡는 이들은 우리 살림살이를 깔보거나 밀어없애는 길에만 섰지 싶습니다. 하나같이 경제성장이란 이름으로 삽질을 끊이지 않아요. 이제는 눈을 바깥이 아닌 마을이며 숲이며 보금자리로 돌려서 ‘살림꽃’을 피우는 길로 갈 때가 아니랴 싶습니다.


  오늘은 어쩐지 학교에서 쓰던 책이 자꾸 손이 잡힙니다. 《조림학원론 하권》(F.S.베이카/현신규 옮김, 한국번역도서주식회사·문교부, 1960)을 집어들고 예전에 나라에서 숲을 어떻게 손대려 했는가를 들여다보고는, 《시조문학사전》(정병욱 엮음, 신구문화사, 1966)까지 쓰다듬습니다. 짤막한 석 줄로 이야기꽃을 피우던 숨결을 헤아립니다. 그래요, 굳이 길게 써야 하지 않습니다. 석 줄로 얼마든지 노래할 만합니다. 눈물도 석 줄로 그릴 만하고, 웃음도 석 줄로 밝힐 만해요.


  때로는 넉 줄도 좋고, 다섯 줄도 좋습니다. 한 줄이어도 좋고, 열여섯 줄이나 여덟 줄도 좋겠지요. 노래하는 마음이라면 가벼운 어깻짓이 됩니다. 노래하는 발놀림이라면 홀가분한 얼굴이 됩니다. 노래하는 손짓이라면 날갯짓하는 오늘이 되어요. 춘천이라는 고장에 나즈막하면서 의젓한, 차분하면서 듬직한 여러 책집이 사이좋게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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