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

숲에서 짓는 글살림

40. 빛둥이



  “속 좀 풀자.”고 말할 적에는 두 가지 뜻입니다. 성이 나거나 골이 난 속(마음)을 찬찬히 다스리자는 뜻이 첫째요, 술을 잔뜩 마시느라 메스껍거나 힘들거나 아픈 속(배)을 부드럽게 다스리자는 뜻이 둘째입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 사전을 들추면 ‘마음풀이’를 나타낼 ‘속풀이’는 바르지 않으니 ‘분풀이(憤-)’로 고쳐야 한다고 다룹니다.


  이런 사전풀이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성이 났기에 성을 풀려고 ‘성풀이’를 할 수 있습니다. 속마음을 풀려고 하니 ‘속풀이·마음풀이’를 할 수 있을 테고요. 있는 그대로 쓰는 말입니다. 굳이 한자 ‘분(憤)’만 표준말로 삼을 까닭이 없습니다.


  낱말을 풀이해서 ‘말풀이·낱말풀이’에 ‘뜻풀이·사전풀이’라 하지요. 이러한 얼거리를 살핀다면 여러 자리나 결을 살펴서 새롭게 쓸 말을 지을 수 있어요.


 책풀이 ← 해제(解題)

 길풀이 ← 해법(解法)

 사랑풀이 ← 연애 상담


  꿈을 풀기에 ‘꿈풀이’입니다. 낮꿈이든 밤꿈에 나온 이야기를 풀어내는 꿈풀이가 있다면, 이루려고 품은 꿈을 드디어 눈앞에서 펼쳐내는 꿈풀이가 있어요. ‘사랑풀이’라 할 적에도, 실타래처럼 엉킨 사랑줄을 푸는 길이 하나라면, 너랑 나랑 맺을 즐거운 사랑을 이루는 길도 새삼스러이 사랑풀이가 될 만합니다. 그러고 보면 굿을 할 적에 ‘씻김’이란 말 못지않게 ‘풀이’란 말을 같이 써요. 씻는 일하고 풀어내는 일은 다르니, 다치거나 아프거나 괴로운 곳을 씻기에 씻김이라면, 맺히거나 엉키거나 꼬인 곳을 풀기에 풀이가 되겠지요.


 꽃둥이. 빛둥이

 꽃지기. 빛지기


  서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다리를 놓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널리 알리면서 아름답고 즐겁게 함께하자는 뜻을 밝히는 사람이 있어요. 이러한 일꾼을 한자말로 ‘친선대사’라고도 하는데, 사이좋은 아름다움이란 서로 빛나는 일이니, ‘빛둥이·빛지기’처럼 새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서로 꽃다운 길을 가도록 이끈다는 뜻에서 ‘꽃둥이·꽃지기’ 같은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요.


 숲벼락. 하늘벼락


  땅이 갈라지거나 비바람이 드세거나 너울이 넘치는 일을 아울러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한자말로는 ‘천재지변’이 있습니다만, 어린이가 알아듣기에는 만만하지 않으리라 느껴요. ‘날벼락·불벼락’이란 말이 있으니, 하늘이 와르르 무너지듯이 내리친다는 뜻으로 ‘하늘벼락’이라고, 또 사람이 숲(자연)을 함부로 굴거나 괴롭히는 탓에 숲이 내리는 벼락이라는 뜻으로 ‘숲벼락’이라 하면 어떨까요.


-지만. 지마는 ← 반면, 그 반면, 반대로, 그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대신(代身)


  “그렇지만 대신에 ……” 하고 말하는 이웃님 이야기를 듣다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지만(지마는)’으로 맺는 토씨는 바로 ‘대신에’를 가리키거든요. 겹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꽤 많은 분이 “그렇지만 그 반면에”라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말씨를 쓰는구나 싶습니다. 단출히 ‘-지만(지마는)’으로 맺고서 지나가면 되어요.


 아무개. 누구. 이름없는. 안 알려진. 낯설다 ← 무명인. 무명


  어린이가 읽는 책에는 ‘무명·무명인’ 같은 낱말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어른이 읽는 책에는 이 말씨가 곧잘 나옵니다. 또 어른 사이에서는 입말로도 제법 쓰더군요. 그러나 꼭 쓸 만한 말씨인가 돌아보면 좋겠어요. 자리를 살펴 ‘아무개’나 ‘누구’라 하거나, ‘이름없는’이나 “안 알려진”이나 ‘낯설다’를 쓰면 돼요.


 가만히. 살며시. 넌지시. 슬며시


  알 듯 모를 듯 할 적에는 어떤 낱말로 나타내면 좋을까요? 이때에 글밥 먹은 어른은 으레 ‘은유·은유적’이나 ‘암시·암시적’ 같은 말씨를 씁니다만, 어른 사이에서도 못 알아차리는 분이 있고, 어린이라면 더더구나 못 알아차립니다. ‘은유·암시’ 같은 말씨를 쓰는 길이 더 넓거나 깊게 생각을 북돋울까요? 아니면 ‘가만히·살며시·슬며시·넌지시’에다가 ‘살짝·슬쩍·살짝살짝·슬쩍슬쩍’을 쓰는 말씨가 한결 넓거나 깊게 생각을 북돋울까요? 이밖에 ‘문득·얼핏·설핏·얼핏설핏’이라든지 ‘빗대다·에두르다·눙치다’나 ‘조용히·조용조용’으로도 알 듯 모를 듯 하는 몸짓이나 결을 나타낼 만해요.


 다음얘기. 둘째판. 다음판. 두걸음


  미국이나 영국 연속극이나 영화에서 곧잘 쓰던 영어 “시즌 투”인데, 이제는 한국에서 이 말씨를 곳곳에서 쓰곤 합니다. 영어를 쓴대서 나쁘지 않습니다만, 우리한테 한국말이 있다면 한국말로 새 말씨를 생각해 볼 만합니다. 수수하게 ‘다음얘기·다음이야기’라 할 수 있어요. 첫째 이야기를 지나 둘째 이야기가 된다면 ‘둘째얘기’라 해도 되고, ‘둘째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판’도 어울리고, ‘걸음’을 넣어 ‘두걸음·세걸음·네걸음’이라 하면 “시즌 투·시즌 쓰리·시즌 포”나 ‘2회·3회·4회’나 ‘2부·3부·4부’까지도 담아낼 만합니다.


 맞춤솜씨. 맞춤길. 새솜씨. 새길 ← 적정기술


  나라 곳곳에서 ‘적정기술’을 말하고 ‘적정기술센터’라는 곳도 생깁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이 땅에 알맞게 새로운 솜씨나 재주를 펼치거나 나누려 한다면, 이 땅에서 쓰는 말글도 알맞거나 새롭게 가다듬는 길을 가면 더욱 좋겠지요? 알맞춤한 솜씨처럼 알맞춤한 말이며 글을 쓰면 참으로 고울 테고요. 맞춤이 아름답다면 ‘맞춤솜씨’요, 우리는 ‘맞춤길’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하고 다른 솜씨요 길이라면 ‘새솜씨·새길’이 되겠지요.


  처음부터 아주 놀랍거나 대단하거나 멋진 말을 찾아내거나 지어서 써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수수하거나 투박한 말씨를 쓰면 되고, 흔하거나 너른 낱말을 하나하나 살펴서 조곤조곤 쓰면 되리라 느낍니다.


  모임을 이끌기에 ‘회장’이라고 합니다만, ‘회 = 모임’이요 ‘장 = 지기’예요. 꾸밈없이 ‘모임지기’라 할 수 있고, 모임을 이끄는 빛 같다는 뜻으로 ‘모임빛’이라 해도 어울립니다.


  말을 살리는 길도 이와 같으니, 우리는 말빛을 가꾸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말빛지기’가 되겠지요. 말을 다루는 학자나 사전을 쓰는 사람은 말빛지기가 됩니다. 알찬 책이나 잡지를 여미는 일꾼이라면 ‘글빛지기’일 테고요. ‘글빛지기’란 출판사로는 편집자가 될 테고, 신문·잡지사로는 기자가 되겠지요. 수수하게 ‘말빛둥이·글빛둥이’나 ‘말빛돌이·글빛순이’라 해도 재미있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리는 숲노래(최종규).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2019년까지 쓴 책으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