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상냥한 이야기꽃 그림책 (2020.1.23.)

― 전남 순천 〈도그책방〉

전남 순천시 도서관길 15

061.754.1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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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고장에 작은가게가 있습니다. 큰고장에서 바라보자면 작은고장일 텐데, 시골에서 바라보면 이 작은고장도 작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며 자동차이며 북적거리고, 건널목이 많고, 시끌시끌한데다가 높직높직한 아파트도 많습니다. 얼마나 커야 큰고장이고, 얼마나 작아야 작은고장일까요.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터라면 모두 삶터일 뿐, 크니 작니 하고 가를 뜻이 있을까요.


  고흥에서 살며 이 마을이나 저 마을로 나들이를 가기는 수월하지 않습니다. 큰고장하고 달리 시골에서는 옆마을로 가는 버스가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모든 시골버스가 읍내 한 곳을 바라봅니다. 고흥에 고흥읍하고 도양읍 두 곳이 있는데, 면하고 면을 잇는 시골버스길은 하나도 없고, 도화면에서 도양읍을 가거나 봉래면 나로섬에 가는 시골버스길도 아예 없습니다. 모두 고흥읍으로 가서 크게 에돌아야 합니다.


  시골에서 시골버스로 이웃마을을 다니기 참 벅차구나 하고 느끼며 열 해 남짓 살다가 순천 시내버스에 조금씩 몸을 맞춥니다. 고흥에는 마땅한 책집이 없기에 순천으로 마실을 갑니다. 책을 손으로 만지고 살펴서 장만하려면 하루를 꼬박 쓰고 찻삯을 꽤 들여야 합니다. 적어도 고흥읍에 ‘참고서·학습지 가게’ 아닌 ‘책가게’가 있다면 품이며 돈이며 겨를을 버스에서 흘리지 않겠지요.


  그렇지만 읍내로 가는 시골버스를 타고, 고흥읍에서 순천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간 뒤에, 순천 시내버스를 이모저모 살펴서 드디어 제대로 내리고는 골목을 헤맨 끝에 책집에 닿는, 차라리 서울로 시외버스를 달리는 길이 훨씬 빠르다 싶은 이 마실길을 굳이 갑니다. 길그림으로 보면 서울보다 훨씬 가까운, 막상 서울길보다 품이며 돈이 더 들지만, 그래도 이웃책가게를 만날 수 있거든요.


  집에서 길을 나서며 시골버스에서 동시를 한 자락 씁니다. 읍내에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며 이 동시를 흰종이에 옮겨적습니다. 순천으로 가는 시외버스에서 동시를 석 자락 더 씁니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작은아이하고 도시락을 먹는 볕이 좋은 나무 곁에 앉아서 흰종이에 마저 옮겨적습니다.


  이러고서 〈도그책방〉에 닿습니다. 작은아이는 버스를 여러 판 갈아타면서 한참 걸리는 마실길을 반깁니다. 낯선 버스가 재미있고, 커다란 고장(서울보다 작아도 고흥보다 훨씬 큰)을 두리번두리번하면서 재미있어 합니다.


  열 살 어린이(2020년)를 이끌고 순천마실을 하다가 얼핏 생각합니다. 1994∼2003년에 서울에서 살며 으레 혼자서 온 서울 골목을 두 다리나 자전거로 헤집으면서 마을헌책집을 찾아나섰고, 새로 만난 마을헌책집을 손으로 길그림을 그려서 복사한 뒤에 둘레에 나눠 주었습니다. 낯선 서울을 만나는 길은 으레 두 다리하고 자전거였어요. 이러며 큼큼 냄새를 맡지요. 어디에서 책내음이 흐르려나 하고 코를 바짝, 귀를 쫑긋, 눈을 땡글, 그야말로 안 들쑤신 서울 골목이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아버지한테서 태어난 작은아이인 터라, 이 아이가 《기차 타고 부산에서 런던까지》(정은주 글·박해랑 그림, 키다리, 2019)라는 그림책에 꽂혀도 그럴 만하겠네 하고 여깁니다. 그림책을 넘기는 작은아이한테 속삭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고이 그러모을 줄 안다면 가볍게 훨훨 날아서 어디로든 다닐 수 있어.”


  새옷을 입고 나온 《원피스를 입은 아이》(크리스틴 발다키노 글·이자벨 말랑팡 그림/신수진 옮김, 키다리, 2019)를 고릅니다. 치마를, 무엇보다 꽃치마를 즐겁게 입는 사내로 살아가기에 이러한 그림책이 마음에 듭니다. 지난 2015년에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란 그림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무척 멋스러운 그림책이라고 느껴요. 어른 인문책 사이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아직 산뜻하게 흐르지 못하지만, 어린이부터 누리는 그림책밭에서는 틀을 깨고 울타리를 밀어내는 상냥하면서 고운 이야기가 춤을 춥니다.


  새를 아끼는 큰아이가 새롭게 누릴 만하리라 여기면서 《저어새는 왜?》(김대규, 이야기꽃, 2018)를 고릅니다. 이런 알뜰한 그림책이 나온 적이 있군요. 이 그림책 하나는 딱딱하고 어려운 말로 가득한 어른 인문책 100권보다 훌륭하다고 여깁니다. 단출하면서 따뜻하게, 눈물겨우면서도 처지지 않도록, 찬찬히 가다듬는 손길로 빚은 붓끝이 싱그럽습니다.


  조금 더 꿈날개를 펴며 이야기를 엮으면 좋을 텐데 싶은 《아기곰의 가출》(벵자맹 쇼/염명순 옮김, 여유당, 2018)도 고릅니다. 아기곰 이야기가 여러 꾸러미로 나오는구나 싶은데요, 아기곰에 빗댄 사람살이가 좀 서울스럽습니다. 굳이 아기곰을 빗대어 그리지 말고 어린이 그대로 그려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굳이 아기곰을 그리고 싶다면 ‘곰 마음’이 되어서, 숲이며 들이며 골짜기이며 더 깊고 너르게 펼쳐서 담으면 좋겠어요. ‘곰인 척하는 마음’으로 그릴 적에는 그닥 재미있지 않습니다.


  도서관 옆 그림책방인 ‘도그책방’을 한껏 누리는 동안 저는 미리 써 놓은 동시를 책집지기한테 드립니다. 작은아이는 책집에서 신나게 그린 그림을 책집지기님한테 건넵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서 어스름이 될 때까지 같이 돌아다닌 작은아이는 순천 버스나루에 닿아 바로 고흥으로 돌아가는 시외버스에 오르기 무섭게 제 어깨에 기대어 곯아떨어집니다. 고흥읍에서 내리기까지 새근새근 꿈마실을 하는군요.

  우리는 읍내에서 저녁거리를 장만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자, 마무리는 택시를 타자꾸나. 오늘 우리, 버스만 실컷 탔으니 이제는 느긋이 돌아가서 쉬자.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리는 숲노래(최종규).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2019년까지 쓴 책으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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