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소리 19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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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

- 아직 사랑을 모르니 때로는 미움불꽃



《순백의 소리 19》

 라가와 마리모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20.1.25.



  문득 피리를 부는 아이가 “아, 오랜만에 부니 힘드네?” 하고 말합니다. “늘 하지 않고 오랜만에 하면 무엇이든 다 힘들지. 그렇지만 오늘부터 다시 날마다 꾸준히 피리를 불면 하나도 안 힘들 테지.”


  오래도록 쓰지 않으면 먼지가 앉습니다. 세간이나 살림에도, 우리 힘살이며 몸에도 먼지가 앉아요. 새삼스레 꺼내어 쓸 적에는 좀 삐걱댄다든지 어설플 만한데, 이제부터 차근차근 쓰노라면 어느새 먼지는 말끔히 가시면서 잘 움직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도 술술 흐를 만합니다.



“츠가루 샤미센의 소리는 ‘혼’이라꼬 생각합니다. 쪼매씩이라도 들어주실 기회를 늘려서, 후토자오 음색을, 모두의 마음에 심어 주고 싶네예. 그러기 위해, 지금 멤버들과 노력하고 있습니다.” (19∼20쪽)


‘술렁이는 잎사귀. 점점 더 잘 들리게 됐다. 귀가 밝아졌다. 더욱더, 더욱더 밝아졌으면.’ (44∼45쪽)



  더 잘해야 하거나 솜씨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즐겁게 하면 즐겁고, 사랑을 담아서 하는 동안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밥을 짓거나 옷을 깁거나 집을 가꾸거나 밭을 매거나 노래를 하는 자리, 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때,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달릴 적, 언제 어디에서나 따사로이 숨결이 흘러요.


  밥자리에서는 밥을 지은 사람 숨결을 받거나 나눕니다. 옷을 입고 벗어서 빨거나 개면서 이 옷을 지은 사람 넋을 헤아리거나 누립니다. 노래를 들을 적에는 어떨까요? 노래를 지은 사람을 비롯해서, 이 노래를 부르거나 들려주거나 악기로 켜는 이들이 마음에 담은 숨결을 함께하겠지요.



“사와무라, 손 좀 보자. 왼손.” “?” ‘뭐야! 굳은살 생긴 부분도 굳기도 나와 거의 다를 게 없어! 무데 무슨 차이지?’ (62쪽)



  고등학교라는 길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겨 말끔히 그만둔 아이가 있다지요. 이 아이는 샤미센이라는 악기를 온몸뿐 아니라 온마음으로 켜서 이웃하고 맑고 밝은 노랫결을 나누는 꿈이 있다지요. 누구는 말합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 켜도 되지 않느냐고. 누구는 말합니다. 대학교에 가서 더 배우고서 켜도 되지 않느냐고.


  아이는 중학교 다닌 일도 썩 내키지 않습니다. 책상맡에 얌전히 앉아서 교과서를 펴기보다는 두 손에 악기를 켜면서 노랫결을 퍼뜨리고 싶어요. 삶이 숨쉬는 이야기를 노랫가락에 실어서 나누고 싶어요. 이러한 이야기를 다루는 《순백의 소리 19》(라가와 마리모/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20)을 읽으면, 지난 열여덟걸음에 걸쳐서 이 아이가 걸어온 길이며, 겪은 하루이며, 만난 사람이며, 이 모두가 새삼스레 ‘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노랫결’을 더 깊고 넓게 어루만져 주는구나 하는 대목을 느낄 만합니다.



‘뮤즈가 사라져도 안타까운 마음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새로운 프레이즈가 아련히 떨어져 내린다. 어떤 때라도 샤미센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나, 귀신인가.’ (95쪽)



  홀로서기를 하면서 씩씩한 아이입니다. 어머니한테서도 형한테서도 떠나며 꽤 이르다 싶은 나이부터 홀로 살림을 꾸리고 하루를 짓는 아이입니다. 아마 지난날에는 온누리 어디에서나 스스로 길을 닦는 어린이나 푸름이가 많았으리라 생각해요. 오늘날에는 다들 초·즁·고등학교를 다니는 길을 가지만, 스스로 꿈이 있다면 구태여 졸업장학교를 다녀야 하지 않아요.


  삶터에 두 발을 디디면 되어요. 삶자리를 제 손으로 하나씩 세우면 되지요. 삶을 북돋우는 일거리를 스스로 닦으면 됩니다.


  빼어난 스승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보고 가다듬고 추스르면서 나아갑니다. 훌륭한 길잡이가 알려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엉성하건 어설프건 대수롭지 않아요. 모두 스스로 느끼고 치르고 깨달으면서 나아가면 되어요.



“사와무라는 좋겠어. 츠가루 샤미센 본고장에 태어나서, 소리도 악기도 늘 가까이 있었을 테니.” “나는 운이 좋아 할배가 연주자였을 뿐이지. 아오모리 출신이라고 누구나 소리와 가까운 건 아이다.” (112쪽)



  노래뿐 아니라 모든 살림이 매한가지입니다. 빼어난 밥지기가 차려 주거나 지어 주는 밥이기에 훌륭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하나 새로 익혀서 지으면 될 밥입니다. 다시 말해서, 노래를 짓는 일을 누구한테서 배워야 하지 않아요. 노래종이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에 흐르는 가락을 잡아채어 그때그때 새롭게 노래로 옮기면 되어요.


  글쓰기를 누구한테서 배워야 할까요? 늘 스스로 쓰고 스스로 가다듬어서 스스로 펴면 되어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누구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스스로 배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찾아보고 살펴서 알아내고는 스스로 삭이고 어루만지면서 녹여내어 우리 숨결로 새로 품어요.



“할배의 ‘춘효’맨치로 성숙했을 때 내보일까 생각합니더.” “그게 몇 년 후지?” “글쎄요, STC를 위한 곡은 아이겠네예.” (166쪽)



  우리가 수저를 쥐고서 우리 입으로 밥을 넣습니다. 우리 몸에서 밥이 흐르고 돌다가 밑으로 나옵니다. 우리가 코를 킁킁하면서 바람을 마십니다. 우리 살갗이 바람결을 느끼면서 탄탄합니다. 우리가 앞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귀를 쫑긋하면서 갖은 소리를 받아들입니다.


  네, 모조리 스스로 합니다. 스스로 하지 않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렇지요. 언제나 스스로 보고 겪고 누껴서 스스로 짓고 가꾸며 세워요.



‘뭐가 성원이야. 자기 연주를과시하려는 것뿐이잖아! 화가 난다.’ (190쪽)



  사랑이 타올라 온누리를 포근하게 감쌉니다. 때로는 미움이 타오르면서 자질구레한 것을 확 태웁니다. 아직 풋풋한 아이는 아직 사랑을 모르니, 때때로 미움을 마음에 끌어당겨서 스스로 타올라요.


  그래요, 미움이라는 불길도 겪어야겠지요. 짜증이라는 불길도 치러야겠지요. 어느 때에는 시샘이라는 불길도, 부러움이라는 불길도, 창피라는 불길도, 몽땅 스스로 껴안아야 할 테지요.


  이러고 나서 어느 날 문득 알아보리라 생각해요. ‘아, 그저 사랑이면 되는 길이었네?’ 하고요.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언제나 가장 아름다이 노랫가락을 펴는 때는 오롯이 사랑일 때입니다.


  아이는 사랑을 노랫가락으로 얹고 싶어서 긴긴 길을 홀로 나섭니다. 아이는 사랑을 제 마음속에서 끌어내어 포근한 햇볕처럼 나누고 싶기에 오늘 이 길에 섭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리는 숲노래(최종규).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2019년까지 쓴 책으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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