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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잡지 편집장이 된 여든 살 할머니
― 내가 사랑하는 2019년 올해책 《80세 마리코》
2019년 1월 1일부터 2019년 12월 31일 사이에 나온 책을 모두 읽지는 못했습니다. 올해에 나온 책을 모두 장만할 돈이 아직 없기도 했지만, 눈에 안 뜨인 책이 있고, 미처 알아보지 못한 책이 있습니다. 그래도 다달이 백 자락 넘게 챙겨서 읽은 사람으로서 제 나름대로 2019년 올해책 한 가지를 꼽으려 합니다.
지난 2018년 10월 31일에 첫걸음이 나오고, 2019년 1월 3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두걸음부터 열걸음까지 잇달아 나온 만화책 《80세 마리코》(오자와 유키/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입니다.
“있어요!! 조… 좋은 거!! 나, 나는요, 지금 이 순간을 몇 십 년이나 기다렸으니까…!!” (2권 42∼43쪽)
만화책 《80세 마리코》는 아마 많이 안 팔렸을 수 있고, 이런 만화책이 있는 줄 모르는 분도 많을 테며, 이 만화책을 눈여겨본 기자나 비평가도 거의 없다시피 하지 싶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이 만화책을 알아차리든 못 알아차리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한 해 사이에 자그마치 아홉걸음이나 한국말로 나온 ‘여든 살 할머니가 갖은 가시밭길을 신나게 헤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줄거리’를 들려주는 이 만화책은, 바로 오늘날이기에 더 눈여겨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든 분이 늘어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제 여든이란 나이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라고 하기보다 ‘아직 한창’이라 할 만한 때에 이르렀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 만화는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다가갈 적에 스스로 아름다이 피어나는 꽃인가를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난 꼭 소설을 쓸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써서 책을 낼 거예요. 당신이 있는 곳에 전해질 수 있도록. 당신이 그걸 읽어 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이어질 수 있을 거예요.” (3권 75∼76쪽)
영화 〈뮬란〉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아버지는 이녁 딸이 못물을 들여다보면서 마음앓이를 할 적에 살며시 다가와서 ‘늦꽃’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먼저 피어난 꽃이든 나란히 흐드러진 꽃이든 다 곱다고, 그러나 가장 나중에 피어나는 꽃, ‘늦꽃’이 어느 꽃보다 한결 곱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들려주어요.
“작가는 잡지에 공헌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죠. 작가는 좀더 좋은 작품을 쓰고, 잡지는 그 자리를 제공한다, 전 늘 그런 곳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4권 119쪽)
만화책 《80세 마리코》에 나오는 할머니 마리코 님은 여든 살 나이에 갖가지 일을 겪어요. 첫째, 소설을 써서 번 돈으로 지은 집에서 쫓겨납니다. 따지고 보면 쫓겨난다기보다 스스로 떠난 셈이지만, 아들이며 며느리이며 손자이며 손자 며느리이며, 마리코 할머니하고 생각이며 삶이 너무 다른 길인 줄 뒤늦게 느껴요. 비록 그 집이 마리코 할머니 온삶이며 피땀이 깃든 집이지만, ‘곧 죽으리라 여기는 눈길’을 느끼면서, 그 집을 스스로 내려놓기로 해요.
그런데 주머니에 몇 푼 없이 집을 떠나요. 빈털터리이다 싶은 몸으로 ‘내가 온삶을 바쳐 지은 집’에서 나온 여든 살 할머니는 피시방 비슷한 곳에 머물면서 길고양이를 건사합니다. 그리고 이즈음 문학잡지에서도 잘립니다.
“잡지에 활력을 준다고 했는데, 애초에 잘린 작가인 당신은 거기에 안 들어가는 거 아닌가요?” “어머. 내 이야기를 이해 못 했나요?” “이해했는데요?” “난 ‘군세이’가 추구하는 작풍과 벗어나버려서 잘렸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 자신의 잡지라면 괜찮을 거란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죠?” “‘군세이’가 만들고 싶은 것과 내가 만들고 싶은 건 다르니까요.” (5권 65∼66쪽)
여든 살에 글쓸자리를 잃은 할머니 마음은 어떠할까요? 집이며 아이들도 마음에서 잃어야 했는데, 마지막까지 할머니 삶을 버티던 글쓸자리가 사라진 뒤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때에 갈 만한 길은 매우 좁기 마련입니다. 냇물이나 바다에 뛰어들어 몸을 버릴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뛰어내려 몸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여든 살 마리코 할머니는 이렇게 괴롭고 힘들 적에 품에 건사한 길고양이를 떠올립니다. 이 길고양이 아이도 무척 괴롭고 힘든 가시밭길을 걸었을 텐데 끝까지 살아서 ‘나를 만나’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하지요.
“내게 어머니는 ‘작가 코자쿠라 쵸코’야. 그 소설의 힘으로 세상의 눈이 다시 코자쿠라 쵸코를 보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이건 쓰레기가 아냐.” (6권 154쪽)
“난 기뻐요. 60살이나 차이가 나는 당신이 같은 곳에서 초쿄 씨를 바라보고 있다니.” (7권 60쪽)
여든 살에 이른 소설지기 할머니 앞에 놓인 길이 매우 좁다 보니, 오히려 이 할머니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더 씩씩하게 나아갈 수 있기도 합니다. 아직 아무도 가지 않았을 길이니 먼저 갈 수 있어요. 아직 누구도 그 길이 잘될는지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불꽃을 태울 만하다고 여겨요.
우리 삶터를 돌아보면 좋겠어요. 오래된 마을이거나 골목이니까 싹 허물어서 아파트를 올리면 될까요? 그런데 오랜 마을이나 골목을 밀어내어 아파트를 올리더라도 스무 해나 서른 해가 지나면?
또 하나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일본이든 유럽이든 중남미이든, 또 쿠바 같은 나라에 마실을 가면서 어느 길을 걷고 어느 곳에서 아름답다고 느끼나요? 새로 올려세운 높직한 첨단문명이 번쩍거리는 곳에서도 아름답다고 느낄 분이 있겠지만, 오랜 마을이나 골목이나 터전을 돌아보려고 여러 나라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무척 많습니다.
“작가는 언제나 집안에만 있는데, 언제 낡은 옷이 생기겠어. 24시간 기분 좋게 지내고 싶잖아. 언제든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싶다고.” (7권 146쪽)
“어떤 이야기를 가져와도 여기 사람들은 바뀌지 않아요. 오랜 시간 같은 풍경에 세뇌되어 의욕을 잃어버리고 주도권은 집주인에게 빼앗겼죠.” (8권 43쪽)
만화책 《80세 마리코》는 모든 틀을 와장창 깨면서 나아가는 삶길을 그립니다. 설마 저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 길을 그립니다. 만화이니까 그릴 수 있는 얘기 아니냐고 묻는다면, 바로 만화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렇게 모든 낡은 틀을 깨부수고서, 모든 새로운 길을 여는, 게다가 여든 살 할머니부터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즐거운 꿈길을 그립니다.
‘사랑은 당연히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몇 년을 수십 년을 거듭 쌓아왔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거야.’ (9권 29∼30쪽)
‘내일 일은 모른다. 답이란 없다. 하지만 지금을 바꾼다면 다른 내일이 올지도 모르지.’ (9권 131쪽)
미움, 시샘, 등돌림, 검은셈, 꿍꿍이, 괴롭힘, 눈속임, 따돌림 들이 춤추는 판에서 여든 살 할머니가 살아날 길은 참으로 팍팍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온갖 것이 춤추는 판이기에 더 기운을 낼 만하기도 해요. 이런 판을 싹 갈아엎어서 다같이 웃음판이 되고 노래판이 되는 길을 그릴 수 있습니다. ‘여태 이랬는걸?’ 하고서 고개를 돌리는 길이 아니라, ‘앞으로 남은 삶이 얼마인지 몰라도, 티끌 하나만큼도 아쉽지 않게 온힘을 사랑으로 쏟겠다’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어요.
“옛날 책이 재미있니?” “옛날 아니야. 책을 읽으면 거기에 갈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이야. 아빠 책장은 모르는 지금이 가득 있어.” “아빠가 갔던 곳에 너도 가는 거구나.” ‘책은 속도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장소에서 천천히 시간을 뛰어넘는 거야.’ (10권 74∼75쪽)
여든 살 소설지기 할머니는 이제 열 살쯤 되었나 싶은 아이가 이녁 소설을 재미있다면서 읽는 모습을 보고는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일흔 해를 가로지른 어린 동무를 만나서일 수도 있지만, ‘책이 품은 힘’이 무엇인가를 여든 살에 이르러 처음으로 헤아렸기 때문이라 할 만해요.
어제하고 오늘을 잇는 책이 됩니다. 오늘 이곳에서 앞으로 나아갈 새빛을 밝힐 수 있는 책입니다. 아직 겪지 못한, 또는 무척 오래된 일이라 이 몸으로 갈 수 없는, 그런 모든 삶이며 살림이며 사랑을 ‘책 하나를 손에 쥐어’서 만날 수 있다는 마음을 어린 동무한테서 배웁니다.
“있습니다. 미래는 저도 신도 선생님도 모르는 거죠. 그러니까 ‘있다’고 믿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10권 103쪽)
빈손에 빈몸이니 그저 부딪힙니다. 터무니없는 꿈이라 여겨도 나아갑니다. 넘어지니 일어섭니다. 쓰러지니 한참 누워서 기운을 차려 봅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무엇을 하면서 여든 살을 꽃나이로 삼고 꽃길로 가꿀 수 있겠는가를 생각합니다. 자꾸자꾸 생각합니다. 끝이 아닌 첫길을 생각하고, 혼자 가는 길이 아닌,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빛날 길을 생각합니다. 2019년을 지나 2020년에 더 나올 만화책 《80세 마리코》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새롭게 흐를까요?
올해책이자 아름책인 이 만화를 여러 이웃이 사랑하면서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요, 아름책입니다. 아름다운 책이어서 아름책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짓도록 넌지시 알려주는 징검다리가 되기에 아름책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리는 숲노래(최종규).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2019년까지 쓴 책으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