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
숲에서 짓는 글살림
38. ‘한말’로 짓는 달콤한 노래
아이들하고 마실을 다닐 적에 아이들 스스로 표를 끊도록 합니다. 돈도 아이가 스스로 치르도록 합니다. 아이들은 처음에 꽤 쭈뼛거렸어요. 아니, 아무 말도 못하고 수줍어 하더군요. 그렇지만 한 해 두 해 흐르더니, 세 해 네 해 지나가니, 이제 표파는곳 앞에 서서 씩씩하게 “어린이표 하나 주셔요!” 하고 말합니다.
어린이는 어린이 스스로 “어린이표 주셔요”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린이표’ 같은 이름을 쓴 지는 아직 얼마 안 되어요. 예전에는 으레 ‘소아’나 ‘유아’나 ‘아동’ 같은 한자말만 썼습니다.
때로는 제가 혼자서 어린이표까지 끊어요. 이때에 흔히 “어른표 하나랑 어린이표 둘 주셔요!” 하고 말합니다. 고장마다 살짝 다르기는 해도 몇 해 앞서까지만 해도 ‘어른표’라는 말을 ‘성인표’로 바꾸어서 대꾸하는 일꾼을 제법 보았으나 요새는 표파는곳에서도 ‘어린이표·어른표’라는 이름을 스스럼없이 씁니다.
우리 집 어린이는 아직 손전화를 안 씁니다. 굳이 써야 할 까닭이나 일이 없어서 안 쓰기도 하는데요, 둘레에서는 꽤 어리다 싶은 아이한테까지 손전화를 맡기더군요. 아니, 초등학교뿐 아니라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까지 손전화를 챙기곤 해요. 이때에 쓰는 이름은 ‘키즈폰’이더군요.
어린이표 ← 소아표 / 아동표
어른표 ← 성인표
어린이전화 ← 키즈폰
어린이쉼터 ← 키즈카페
어린이가 마음껏 뛰놀 빈터가 자취를 감추면서 따로 ‘키즈카페’가 생기곤 합니다. 마을 어린이가 서로 동무가 되어 즐겁게 놀이를 지어서 누리던 살림길이 차츰 옅어지며 ‘놀이하는’ 몸짓도 사라지는 셈인데요, 이러면서 어린이답게 쓰던 말까지 시나브로 잊혀지지 싶어요. ‘어린이쉼터·어린쉼터·아이쉼터’ 같은 이름을 써도 넉넉하지 않을까요.
하룻내
한자말 ‘종일(終日)’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동안”을 뜻한다고 해요. ‘온종일·진종일’ 같은 한자말도 뜻이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말 ‘하루’도 뜻이 같아요. “하루 종일”이나 “하루 온종일”이나 “하루 진종일”이라 하면 모두 겹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손질해야 알맞을까요? 먼저 ‘하루’라고만 하면 됩니다. 군더더기 없이 쓰면 걱정할 대목이 없어요. 힘줌말로 쓰고 싶다면 “하루 내내”라 할 만하고 ‘온하루’라 해도 어울립니다. “하루 내내”를 줄여 ‘하룻내’ 같은 새말을 지어도 되어요.
달콤멋
‘로맨틱(romantic)’이란 낱말을 영어사전에서 살피면 ‘로맨틱한’으로 풀이해요. 이런 풀이는 알맞을까요? 일본사전을 그대로 베끼거나 훔친 풀이는 아닐까요? 이제라도 영어사전이 영어사전답도록 뜻풀이를 모조리 손질하거나 새로 붙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말사전 뜻풀이도 참 엉성하지만, 영어사전을 비롯한 여러 사전도 엇비슷합니다. 우리는 일본 정치꾼 아베가 일삼는 막짓이라든지 여러 곳에서 불거지는 막말을 나무라는데요, 이 나무람이나 호통이 ‘일제강점기부터 스며들어 얄궂게 퍼진 말씨’로까지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구나 싶어요.
한국말은 한국말답게 쓰면서, 영어는 영어답게 익혀서 쓰는 길을 새삼스레 다스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를테면 ‘로맨틱’ 같은 영어는 ‘낭만적인’이란 일본 한자말 풀이로도 다루지 말고 ‘사랑스러운(사랑스런)’이나 ‘달콤한’이나 ‘멋있는·멋진·멋스러운’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애틋한’이나 ‘포근한·따스한·살가운’으로 풀어낼 수 있어요.
달콤맛·달달맛·포근맛·사랑맛
달콤멋·달달멋·포근멋·사랑멋
달콤한 일이 있습니다. 달달한 사랑이 있습니다. ‘달콤사랑’처럼 새롭게 써도 좋고, ‘달콤사랑맛’처럼 더 길게 써 보아도 좋습니다. 단출하게 ‘달콤하다’나 ‘사랑스럽다’라 해도 되고, ‘달콤맛’이나 ‘달달멋’처럼 ‘맛·멋’을 살짝 다르게 붙여도 어울려요. ‘사랑맛·사랑멋’도 어울릴 테고, 사랑이란 포근한 기운이라 여겨 ‘포근맛·포근멋’처럼 새말을 엮어도 됩니다.
말을 짓는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 남이 지어 주지 않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 지은 낱말이 좋구나 싶으면 받아들일 수 있고, 아니로구나 싶으면 우리 깜냥껏 새로 지어서 쓰면 됩니다.
혼밥 ← 1인식
혼밥집·혼밥가게 ← 1인식당
혼자 먹는 밥이라 ‘혼밥’입니다. 이런 말씨는 국어학자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거나 못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밥을 먹고 살아가는 수수한 사람들 스스로 이런 말을 지어서 널리 썼어요.
혼밥은 ‘혼놀이’나 ‘혼술’로도 이어집니다만, 어느새 ‘혼자 찾아가서 먹을 수 있는 밥집’을 가리키는 ‘혼식당’으로도 퍼집니다. 자, 여기에서 더 마음을 기울인다면 ‘혼밥 + 가게/집’ 얼거리로 ‘혼밥가게·혼밥집’ 같은 새 이름을 지어서 알맞게 쓸 만합니다.
‘혼-’을 붙이는 말씨 못지않게 ‘함-’을 붙이는 말씨도 퍼지지요. ‘떼노래’란 말도 씁니다만 ‘함노래’라 할 수 있어요. 함께 먹어서 ‘함밥’이라 하면 되고, 함께 마시니 ‘함술’이 되어요. 함께 앉는 자리를 그냥그냥 ‘단체석’이라 합니다만 ‘함자리’나 ‘함께자리’라 해도 좋습니다.
생각해 봐요. “오늘은 혼술을 할까, 함술을 할까?”라든지 “오늘은 혼밥을 할까, 함밥을 할까?”처럼 이야기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한집에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집삯을 나누어 내기에 ‘함집’이나 ‘모둠집’이나 ‘두레집’을 이룹니다.
우리 스스로 살아가는 결을 고스란히 말에 담습니다. 우리 스스로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새말을 짓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부터 사투리란 말이 이와 같았어요. 임금님이 지어 주는 말인 한문을 쓰던 사람들이 아니라, 고장마다 다 다른 살림에 맞추어 다 다른 눈빛으로 다 다른 말씨를 엮어서 쓰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흐름을 본다면, 한국은 한자문화권이 아닌, ‘한겨레 살림밭’이에요. ‘한살림밭’이나 ‘한살림누리’인 셈이에요. 중국을 섬기며 한문으로 글을 쓰고 말을 하던 임금이나 벼슬아치는 아주 적었어요. 흙을 짓고 들을 가꾸며 숲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을을 돌본 수수한 사람들은 언제나 한겨레 말인 ‘한말’로 노래하는 나날이었지요.
해마다 가을이면 시월에 한글날을 맞이합니다. 한겨레 글씨를 지은 임금님을 기리는 날인데요, 어느덧 우리는 새로운 기림날을 하나 삼을 때이지 싶습니다. 아마 10만 해일 수도, 어쩌면 30만 해일 수도 있는, 한겨레 말씨를 기리는 날을 하나 둘 수 있어요. 이른바 ‘한말날’입니다. 글씨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나 표준말에 갇힌다면, 말씨는 우리 삶자리에서 스스로 지으면서 피어납니다.
앞으로는 ‘한말’을 아름답게 쓰는 사랑스러운 우리가 되면 좋겠어요. 서로 아끼는 마음을 말 한 마디에 담고, 서로 착하게 어깨동무하는 뜻을 말 한 자락에 담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삶말이자 살림말이자 사랑말인 한말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리는 숲노래(최종규).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2019년까지 쓴 책으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