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19.11.26.


《조선 이후 우리옷 한복 이야기》

 글림자 글·그림, 혜지원, 2019.2.15.



며칠째 끙끙거리면서 긴옷을 겹쳐 입는다. 겨울이 코앞이라 긴옷을 입지 않는다. 몸이 다시금 바뀌려 하는구나 싶어서 신나게 앓기로 했고, 이 앓음길을 지나면 어떤 몸빛이 되려나 하고 그리면서 긴옷을 겹쳐 입고서 해롱거린다. 끙끙대거나 해롱대면서 밥을 짓기는 수월하지 않다. 그러나 못할 일도 없다. 밥을 짓고서 드러누우면 되지. 뒷일은 아이들이 마무를 테고. 《조선 이후 우리옷 한복 이야기》를 넘겨 보았다. 셈틀로도 이렇게 그릴 수 있다고 여기지만, 어쩐지 옷결은 붓이나 연필로 담을 적에 한결 살아나지 싶다. 그린님이 무척 애써서 여러 자료를 살피고 이만 한 열매를 얻은 줄은 알겠는데, 자료만 살피고서 빚는 그림하고 몸소 입고서 돌아다니고서 빚는 그림은 사뭇 다르다. 눈으로만 보고 옮긴 그림이 왜 살아숨쉬지 못하겠는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아무리 ‘원화를 마주보고 옮기’더라도 ‘그 원화만큼 생생하지 않은’ 까닭이 뭐겠는가. 처음 그림을 빚은 분은 그림에 담기는 모습을 고스란히 마주한다. 자료만으로는 새로운 자료를 일굴 뿐, 그림으로서 새롭게 피어나는 길을 열지 못한다. 몸소 이 옷 저 옷 입어 보고서 그림을 빚었다면 이 알뜰한 책에 깃든 사람들이 모조리 똑같은 몸짓으로, 죽은 빛으로 서지는 않겠지.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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