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이슬이어도 꽃님이어도 좋다 (2017.11.24.)

― 경남 진주 〈진주문고〉

경남 진주시 진양호로240번길 8

055.743.4123.

https://www.instagram.com/jinjumoongo



  한때 책을 그냥그냥 팔던 철이 있었다고 합니다. 책집에 책을 들여놓으면 손님이 알아서 이 책이고 저 책이고 고스란히 사 가느라, 책을 들여놓기 바쁜 철이 있었다지요.


  종이책이 흘러온 길을 돌아본다면, 고려나 조선 무렵에는 힘이나 돈을 거머쥔 몇몇 사람만 종이책을 만지거나 쓰거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조선이 무너지고 일제강점기가 된 뒤에는 조선총독부 힘하고 돈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종이책이 꽤 많이 나왔으나, 한글로 쓴 책보다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글로 쓴 책이 훨씬 많았습니다. 해방 뒤에도 퍽 오래도록 한자로 새까맣게 찍은 책이 많았어요. 이즈음은 이제 막 해방 뒤 배움터를 펴던 무렵이라 여느 책보다 교과서나 참고서가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출판사뿐 아니라 책집도 교과서하고 참고서 장사로 어마어마하게 돈을 긁어모으던 철입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자로 새까맣게 엮은 책이 줄고 한글로 말끔히 엮은 책이 늘어납니다. 해방 뒤 학교를 다니며 글을 깨친 이가 늘었고, 가벼운 종이책 하나로 스스로 배우거나 누리는 살림이 새로웠기에, 1980년대까지 이르도록 어느 책집이든 책은 날개 돋히듯 사랑받는 읽을거리였다고 합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며 종이책이 한풀 꺾입니다. 그럴 만하지요. 1980년대 무렵까지는 ‘찍어서 들여놓기’만 해도 팔리는 흐름이어서, 일본 책을 몰래 베끼거나 훔쳐서 찍은 책이 너무 나돌았고, 똑같은 책이 껍데기하고 책이름만 다른 채 어지럽고 춤추었어요. 이런 모습을 읽님이 달가이 여기기 어렵지요. 영화나 방송이나 피시통신처럼 새로운 읽을거리하고 만남터가 늘어난 탓도 있다지만, 이보다 책마을 스스로 저작권이란 생각이 없이 ‘팔리면 그냥 가져와서 찍어다가 팔아 보자’는 물결이 너무 짙은 탓을 짚어야지 싶습니다. 이 나라 책마을은 1990년대에 접어들도록 서울 청계천·총판·덤핑·방문판매 같은 이름으로 종이책 값어치를 스스로 갉아먹거나 깎아내렸습니다. 책을 책으로 마주하기보다 돈장사에 너무 치우쳤습니다. 스스로 책을 살림꽃으로 바라보는 눈이 얕았고, 이를 이야기하는 글님도 매우 적었습니다. 이무렵까지 웬만한 글님은 글에 한자를 새까맣게 넣어야 멋있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다고 여기는 눈높이였습니다.


  ‘알차게 지은’ 책보다 ‘팔리도록 만든’ 책이 넘치는 1990년대에 문을 닫는 책집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팔리도록 만든’ 책이 아닌 ‘알차게 지은’ 책을 꼼꼼히 가려서 다루려고 하던 어린이책 전문서점이라든지 여러 인문사회과학서점은 갑자기 빠져나간 손님 물결에 휘청거리기도 하고, 여러 큰 출판사가 모갯값 장난질을 치는 바람에 구석에 몰리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로 접어들어도 문을 닫는 책집은 엄청났습니다. 잃어버린 믿음을 찾기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떠난 손님을 부르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할 테지요. 언제나 첫걸음을 다시 떼어야겠지요.


  펄북스란 이름으로 마을출판사를 열고, 책집을 이모저모 바꾸려고 애쓰는 〈진주문고〉가 있습니다. 숱한 물결을 하나하나 거쳐 오면서 경상도 진주라는 고장에서 그야말로 진주가 되려고 하는 책집이지 싶습니다.


  진주 한켠에 있는 아름책집이자 헌책집인 〈형설서점(즐겨찾기)〉에 들른 뒤에 〈진주문고〉를 찾아갑니다. 1층이며 2층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레진 드탕벨/문혜영 옮김, 펄북스, 2017)부터 고릅니다. 진주문고에 왔으니 펄북스에서 펴낸 책 가운데 아직 장만하지 않은 책 하나를 손에 쥡니다.


  시골살이보다는 텃밭살림 이야기를 다루는 《소농의 공부》(조두진, 유유, 2017)를 살핍니다. 밭이며 땅을 다루는 책인데 글쓴님이 좀 말씨가 어렵고 딱딱합니다. 글쓴님은 소설을 쓰기도 한다는데, 수수한 시골말이나 마을말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면 한결 좋겠습니다.


  시집 칸을 보다가 꽤 묵은 창비시선이 보입니다. 예전 판을 구경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 몇 가지를 살펴서 고릅니다. 《이슬처럼》(황선하, 창작과비평사, 1988), 《차씨 별장길에 두고 온 가을》(박경석, 창작과비평사, 1992), 《너는 꽃이다》(이도윤, 창작과비평사, 1993), 《맑은 하늘을 보면》(정세훈, 창작과비평사, 1990)을 손에 쥡니다. 그런데 1990년에 나온 시집 뒤쪽에 ‘40년 역사의 종합도서백화점 청운서림’ 책종이가 붙는군요. 아마 〈청운서림〉이란 곳에 들어갔다가 반품이 된 책이지 싶은데, 이 책종이를 떼지 않고 다시 〈진주문고〉로 들어왔구나 싶습니다. 해묵은 책종이를 엿보면 〈청운서림〉이란 곳은 그즈음 본점하고 대백프라자점 두 군데가 있었지 싶습니다. 진주에 있던 곳일까요? 아니면 경상도 다른 곳에 있었을까요? 대백프라자란 곳은 대구에 있다고 하니, 아마 대구에 있던 책집이지 싶습니다. 이제는 해묵은 책종이 하나에 이름으로 덩그러니 남은 곳을 가만히 그려 봅니다.


  그리고 이곳 〈진주문고〉는 어제에 이어 오늘하고 모레에 부디 진주답게, 이슬답게, 꽃님답게 이 고장 사람들한테 종이책에 서린 고운 숨결을 함께하는 이음터이자 만남터이자 쉼터로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잘 알려진 책을 그냥그냥 파는 책집이 아니라, 알차게 지은 책을 책님이 문득문득 알아볼 수 있도록 이끄는 슬기롭고 너른 품이 되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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