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 느린걸음 / 2014년 9월
평점 :
숲노래 책읽기
인문책시렁 98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허택 옮김
느린걸음
2014.9.5.
극좌 선동가도 극우 경제학자도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더 필요하다고 대중을 선동한다. 교육자는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생산성을 높이려면 지식을 더 습득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산부인과 의사는 건강한 아이를 낳고 싶으면 자신들이 더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9쪽)
평등한 교육을 약속하는 학교는 불평등한 능력주의 사회를 만들고, 평생 교사에게 의존하며 살게 한다 … 이 시대는 학교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인생의 3분의 1은 무엇을 처방받아야 할지 배우고, 나머지 3분의 2는 자신의 습관을 관리하는 저명한 전문가의 고객으로 살았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54, 55쪽)
전문가의 자기 규제는 오로지 무능한 전문가를 보호하고 대중이 서비스에 더 의존하도록 만든다. 이 ‘비판적 의사’, ‘급진적 변호사’, ‘공공 건축가’들은 자신들보다 변화에 둔감한 동료들로부터 고객을 가로채는 것이다. (107쪽)
1965년 이후 미국에서만 환자 스스로 병을 고치는 방법에 관한 책이 2700여 종이나 쏟아졌다. 그런 책을 읽으면 의사는 정말로 필요할 때만 만나면 된다. (111쪽)
그렇게 자유가 공정하게 분배되어도 천연자원과 도구, 공공시설에 대한 권리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식량과 연료, 신선한 공기, 삶의 공간은 전문가가 만드는 필요와 상관없이 분배되지 않으면 망치나 일자리보다도 공정하게 분배될 수 없다. (115쪽)
어느 날 문득 알았습니다. 도시에서 살며 회사를 다니는 사람은 나라에서 여러모로 펴는 복지를 고루 받을 수 있지만, 시골에서 살며 회사를 안 다니는 사람은 그 어느 복지에도 닿지 않는 줄. 도시에서 아파트를 빌려서 사는 사람은 나라에서 펴는 갖은 복지를 두루 받을 수 있지만, 시골에서 시골집을 장만해서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복지에도 안 닿는 줄.
이런 얼거리를 알거나 느끼려면 시골에서 회사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서 살되, 전원주택 아닌 오랜 시골집, 뼈대가 흙하고 나무요 ‘한 평에 10만 원이 못 되는’ 시골집, 마당까지 해서 100평쯤 되어도 1000만 원 값을 하지 않는 시골집을 장만해서 손질하여 지내는 살림이어야겠지요. 아마 한국에서 이처럼 살림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겠지요.
이제 이 땅에 없고 책이 남은 이반 일리치 님이 남긴 글을 엮은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이반 일리치/허택 옮김, 느린걸음, 2014)를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만,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면 복지나 문화나 교육으로 이바지를 많이 받습니다. 이와 달리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안 한다면 그 어느 이바지하고도 멀리 떨어집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안 넣고 집에서 돌보면 열 몇 해 앞서나 요즈음이나 다달이 10만 원을 받지만(8살까지), 어린이집에 넣으면 얼추 50만 원을 어린이집에 주는 나라 얼개입니다. 아이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 교육·문화비를 꽤 이바지하지만, 아이가 집에 머물며 스스로 배우는 길을 갈 적에는 0원을 이바지합니다.
이는 돈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다니든 집에서 스스로 배우든, 이 아이하고 어버이는 똑같이 세금을 냅니다. 똑같이 세금을 내되, 나라에서 펴는 복지나 문화나 교육 이바지에서 따돌림을 받지요. 나라는 누구한테서나 세금을 고스란히 가져가지만, 이 세금이 누구한테나 고루 복지나 교육이나 문화로 돌아가는 길에는 마음을 안 쓰는 얼거리인 지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이반 일리치 님이 남긴 글을 묶은 책에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같은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이처럼 여러 행정에서 따돌림을 받는 자리에 있는 이웃들은 스스로 ‘쓸모없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하기 쉽고, 이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이 꽤 많은데, 아직 나라 얼개는 바뀔 낌새가 잘 안 보입니다.
‘준법·적법’이라는 말이 함부로 쓰이는 오늘날입니다. ‘법을 지키는·법에 알맞은’인 뜻일 텐데, ‘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뒷일이나 뒷돈이 오가는 흐름’이 꽤 불거지지만, ‘법에 어긋나지 않은 터’라 말썽이 되지 않습니다. 법그물을 살살 빠져나가면서 사회를 주무르거나 흔든다고 할까요.
지역자치라고 하지만, 이 ‘지역자치’란 이름 때문에 오히려 ‘시골 공무원’이 너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를테면, 인구가 2만쯤인 시골 지자체조차 공무원이 1000에 가까운 숫자요, 인구가 4∼5만쯤인 시골 지자체는 공무원이 1000을 웃도는 숫자입니다. 시골 지자체는 인건비로 너무 많이 돈을 쓰는데, 이 공무원 숫자는 거꾸로 더 늘고, 시골 지자체 인구는 빠르게 줄어듭니다. 참다운 자치라면 공무원 숫자를 줄이면서 마을마다 집집마다 스스로 참되고 바르며 곱게 살아가는 길이리라 봅니다. 국회의원도 줄이고, 판·검사도 줄이고, 공무원도 줄이는, 공단 일꾼이며 군인이며 관리자란 자리를 줄이고 줄여, 스스로 삶이며 땅을 가꾸는 길로 가도록 해야지 싶습니다.
늦가을 햇볕에 귤이며 유자가 무럭무럭 익습니다. 귤나무나 유자나무뿐 아니라 모든 나무는 해하고 비하고 바람하고 이슬을 머금으면서 매우 놀랍도록 달콤한 열매를 베풉니다. 사람이 거름을 주지 않을 적에 외려 더 달콤하며 알찬 열매를 오래오래 맺습니다. 가지를 휘어서 쇠그물에 붙들어맨 채 거름이며 비료를 듬뿍 먹이는 과일나무는 열 몇 해쯤 열매를 맺으면 힘이 다하여 뽑아내고 새로 심는다지요.
어쩌면 오늘날 문명사회는 ‘가지를 휘어서 쇠그물에 붙들어맨 체 거름하고 비료하고 농약을 먹여 겉보기로 굵어 보이는 열매를 맺는 나무’와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흐름을 멈추고, 저마다 아름드리로 자라는 나무가 되도록, “사회에서 쓸모있고 쓸모없고란 틀”이 아니라 “다 다르게 어우러지는 숲”으로 나아가야지 싶습니다. ㅅㄴ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