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라도닷컴> 2019년 8월호에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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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35. 가시버시


  제가 여덟아홉 살 무렵이던 어린 날은 1980년대 첫무렵입니다. 이즈음 할아버지 할머니 가운데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말을 읊던 분이 있었어요. 또래끼리 가시내이든 사내이든 섞여서 놀면 몹시 못마땅하다면서 서로 갈라야 한다고 나무라곤 했습니다.


  가만 보니 할머니는 으레 할머니끼리만 어울리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끼리만 어울리더군요. 이런 흐름은 배움터에서 고스란히 드러나, 여느 때에는 가시내랑 사내를 안 가리고 잘 놀다가도 ‘가시내 쪽’하고 ‘사내 자리’로 가르기 일쑤였어요.


  ‘여자 쪽’에서는 더러 ‘남녀’란 말이 안 내킨다고, ‘여남’이라 말해야 한다는 소리가 불거졌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보니 고개를 끄덕일 만해요. 여느 어른은 으레 ‘아들딸’이라고만 말합니다만, ‘딸아들’이라 말해도 되는데 말이지요.


딸아들 : x

아들딸 : 아들과 딸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여남 : x

남녀(男女) : 남자와 여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이쯤에서 국립국어원 낱말책을 뒤적이겠습니다. 나라에서 내놓는 낱말책을 보면 ‘아들딸’만 올림말입니다. ‘딸아들’이란 낱말은 없어요. 한자로 ‘여남’은 없고 ‘남녀’만 올림말로 있어요. 이 대목이 옳지 않다고 여겨서 따진 적 있는데, 아직 국립국어원에서 아무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어릴 적에 둘레 어른들한테 ‘남녀’를 가리키는 우리말은 없느냐고 곧잘 여쭈었습니다. 이때에 마땅하다 싶게 대꾸해 준 분이 없어요. 이러다가 열한 살 즈음이지 싶은데, 그때 길잡이(교사) 한 분이 이모저모 한참 알아보시고는, ‘남녀’를 가리키는 우리말은 못 찾았지만 ‘가시버시’라는 낱말은 있다고, 남녀는 아니고 부부를 가리키는 낱말이라고 알려준 적 있습니다.


가시버시 : ‘부부’를 낮잡아 이르는 말

부부(夫婦) : 남편과 아내를 아울러 이르는 말 ≒ 내외·부처·안팎·이인·항배


  국립국어원 낱말책을 다시 살핍니다. ‘가시버시’는 낮춤말로 여깁니다. 이 대목을 그러려니 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만, ‘부부’ 뜻풀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할밖에 없습니다. ‘안팎’이란 낱말은 ‘내외’란 한자말을 그대로 풀어낸 낱말일 텐데,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고 여길 만합니다. 일본에서는 두 곁사람 가운데 사내 쪽은 ‘주인’으로, 가시내 쪽은 ‘내자’라는 한자말로 가리키곤 합니다. ‘바깥사람·안사람(아내)’은 모두 일본말씨에 물들어 퍼졌다고 할 만해요.


  새삼스레 따질 노릇이라고 여겨요. 예전에 이 땅에서 한자를 쓴 이는 매우 드뭅니다. 이들은 모두 힘바치(권력자)나 글바치(지식인)인데 0.01퍼센트가 안 되었어요. 99.99퍼센트에 이르는 이들은 손수 흙을 일구고 옷밥집이란 살림을 스스로 지어서 누린 수수한 시골사람이에요. 예부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수수한 우리말인 사투리를 썼어요.


  간추려 본다면, ‘가시버시’는 오래된 우리말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쓰던 낱말이요, 힘바치하고 글바치가 중국말을 섬기면서 마치 낮춤말이라도 되는 듯 깎아내리거나 짓밟느라 밀려난 낱말입니다.


 가시버시 : 가시 + 버시


  낱말을 뜯어 볼게요. ‘가시 + 버시’이니 ‘가시버시’입니다. ‘가시’는 누가 보아도 ‘가시내’를 가리키는 이름인 줄 알 테지요? ‘가시 + 버시’ 얼개라서, 겉모습만 보고 문득 ‘뾰족하게 찔리는 가시’를 떠올릴 분이 있지 싶은데요, 그 결도 틀림없이 이 낱말에 깃듭니다만, 더 뿌리를 캐 보겠습니다.


 (가시 = 가시내) + (버시 = 벗) = 가시버시(갓이 + 벗이 = 갓 + 벗)


  ‘가시내·사내’에서 ‘내’는 ‘네’처럼 사람(집)을 가리키는 자리에 붙이는 말입니다. 밑말은 ‘가시’요, 이는 ‘갓’ 꼴로 씁니다. 사내를 가리키는 ‘버시’도 이와 같아서 ‘벗’ 꼴로 쓰기 마련입니다. ‘동무’하고 맞물리거나 비슷하지만 다른 ‘벗’이라는 낱말이 으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를 아스라이 예전 살림자리에서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동무’라는 낱말은 가시내랑 사내를 가리지 않고 쓰던 말이라면 ‘벗’이라는 낱말은 으레 사내끼리 사귀는 사이에서 쓰던 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다음으로 ‘갓’은 두 갈래 쓰임새가 있는데, 첫째는 ‘메·봉우리’입니다. 이른바 ‘산(山)’을 가리키는 낱말이에요. ‘멧갓’이라고도 쓰는데, 봉우리가 어떤 모습인지 그려 보셔요. 아래쪽은 펑퍼짐하게 넓으나 위로 갈수록 좁아지면서 마침내 뾰족한 꼴입니다. 이러한 꼴을 따서 머리에 얹는 것을 두고도 ‘갓’이라 했고, 요새는 한자말 ‘모자(帽子)’를 쓰곤 합니다만, 해를 가리려고 머리에 쓰는 것을 ‘해가림갓’이라 할 만해요. 아무튼 ‘갓’ 하면 으레 조선이란 나라에서 나리(양반)가 쓰던 것만 떠올리는 분이 많으나, 머리에 쓰면 다 갓이라 했어요. ‘삿갓’이란 낱말은 아직 그대로 남았어요. 자, 이러다 보니 ‘갓·가시’가 얽혀, ‘가시 = 뾰족하다’로도 쓰임새가 이어갑니다.


 가시내는 멧갓


  그런데 생각해 보셔요. 오랜 텃말인 ‘가시버시’는 가시내를 앞에 놓은 이름입니다. 눈치를 채셨을까요? ‘버시가시’가 아니라 ‘가시버시’라 했어요. ‘가시집·가시어머니·가시아버지’ 같은 이름이 있는데요, ‘가시 = 뾰족함’이 자꾸 떠오른다면 ‘갓집·갓어머니(갓어미·갓어매)·갓아버지(갓아비·갓아배)’처럼 쓸 만합니다. 높다란 봉우리를 떠올리면서, ‘가시내(갓) = 봉우리’로 바라보는 마음으로 이 낱말 ‘가시버시’를 쓸 만하지요. 그래서, 이 낱말을 살짝 줄여 ‘갓벗’이라 해보아도 어울립니다.


  갓집이 있으니 ‘벗집’이 있고 ‘벗어머니(벗어미·벗어매)·벗아버지(벗아비·벗아배)’가 있습니다. 우리가 즈믄 해를 쓰던 낱말을 헤아리면 좋겠어요. 아니 오만 해나 십만 해를 쓰던 말씨를 되새기면 좋겠어요.


  그런데 있지요, 사내하고 가시내를 가리키던 이름을 파헤치노라면 ‘머스마·머시매’는 ‘머슴’하고 이어지는 고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 한뿌리인 말입니다. 일을 도맡아 하는 사내를 따로 ‘머슴’이라 했어요.


[숲노래 낱말책]

갓벗(가시버시) : 가시내하고 사내(머스마·머시매)를 아우르는 이름. 가시내하고 사내를 함께 가리키기도 하고, 둘이 짝을 맺어서 함께 살림을 짓거나 살아가는 사이일 적에 가리키기도 한다. 갓(가시)은 ‘가시내’를, 벗(버시)은 ‘사내’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앞으로 우리 낱말책은 뜻풀이를 싹 손질해야지 싶습니다. 오랜 우리말을 낮추는 낡은 버릇을 치워내야겠고, 말이 흘러온 자취하고 뿌리하고 결을 제대로 살려서, 오늘날 새롭게 북돋아서 쓰는 길을 밝히기도 해야겠다고 느낍니다.


  ‘갓벗’이라 하면 단출하면서도 뜻이 확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낡은 틀은 이제 치울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갓님하고 벗님이 슬기롭게 어울리면서 살림을 사랑으로 짓는 길을 가르치고 배우고 나누고 노래할 노릇이지 싶습니다. 벗님하고 갓님이 서로 곁에 돌볼 줄 아는 님으로, 곁님으로서 보금자리를 살찌우는 새로운 숨결로 거듭나도록 말 한 마디에 싱그러이 손길을 보태면 좋겠습니다.


  어제는 ‘갓이’랑 ‘벗이’가 수수하게 만났다면, 오늘은 ‘갓님’하고 ‘벗님’이 어깨동무하는 웃음으로 마주합니다. 그리고 우리말 ‘가시버시’는 가시내(순이)를 앞에 놓고 사내(돌이)를 뒤에 놓습니다. 우리말은 예부터 가시내를 멧갓처럼 섬겼습니다. 우리 살림살이를 담은 쉬운 우리말을 쓰면 어깨동무(성평등)로 저절로 나아가게 마련입니다.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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