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2019년 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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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33. 공놀이 좀 해볼랑가
어릴 적에 살던 마을은 야구장하고 가까웠습니다. 저녁에 야구장에 불빛이 환하면 우리 마을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고, 때로는 야구장에서 들리는 우렁찬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요. 대단했어요. 다만, 제가 나고 자란 마을은 전라도 아닌 인천입니다. 제가 늘 지켜본 야구장에는 ‘삼미 슈퍼스타즈’라고 하는 이름으로, 늘 꼬래비에서 허덕이며 ‘언제 안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나’ 싶은 기운이 흘렀습니다.
오늘 저는 전라도에서 아이들하고 살아가는데요, 고흥 시골마을에서 야구를 보는 분은 없지 싶습니다. 괭이자루는 잡아도 공 치는 방망이를 잡을 일이 없겠지요. 그래도 인천에서나 전라도에서나 공을 치고받는 놀이를 바라보는 눈길은 매한가지라고 느끼면서 “자네, 공놀이 좀 해볼랑가?” 이야기를 적어 볼까 싶습니다.
공을 치니께 야구요
어릴 적을 떠올리면, 아무리 야구장 곁 골목집이나 기찻길집에 살던 동무라 해도 야구를 모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오가지요. “야, 넌 야구도 모르냐? 야구장 옆에 살면서?” “야구가 뭔데?” “아이구 참, 공을 던지면 치는 거.” “공을 던지면 치는 게 야구라고? 그럼 공치기이네.” “‘공치기’하고 ‘야구’는 다르지.” “공을 친다면서? 공을 치면 ‘공치기’이지, 그게 뭐야.”
생각해 보면 그래요. ‘야구’는 ‘野球’라는 한자로 적는데, 일본사람이 옮긴 한자말이겠지요. 영어로는 ‘baseball’이에요. 영어하고 한자말은 결이 다르지요. 영어라면 ‘깔개(base) + 공(ball)’이고, 한자말이라면 ‘들(野) + 공(球)’입니다. 어째 좀 엉성한 이름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는 그냥그냥 쓰지만, ‘공치기’라든지 ‘들공’이나 ‘들공놀이·들공치기’라 할 만도 하겠습니다.
던지니께 투수요
야구를 모르는, 그렇지만 ‘공치기’인 줄 알겠다는 동무를 불러서 한판 끼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놀이를 하자면 사람을 채워야 하거든요. 꽤 많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두 쪽으로 갈라 아홉씩, 모두 열여덟은 있어야 합니다. 이때 또 이런 말이 오갑니다. “근데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하긴, 투수가 던지면 타자는 쳐.” “‘투수’는 뭐고, ‘타자’는 뭐냐?” “참 나, 하나도 모르는구나. ‘투수’는 던지는 사람이고, ‘타자’는 치는 사람이야.”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던지는 사람이 던지고, 치는 사람은 친다는 소리이네?” “그래, 투수가 던지면 포수가 받지.” “‘포수’는 또 뭐냐?” “포수는 받는 사람이야.” “야, 무슨 공놀이를 하는데 이렇게 말이 어렵냐? 도무지 못 하겠다.”
웃기자고 늘어놓는 말이 아닙니다. 참말로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다. 야구장 옆에 살지만 야구에는 도무지 마음이 없는 동무를 데려와서 끼우려니 참으로 골이 아파요. 아니, ‘공격·수비’란 말도, ‘1루·2루·3루·홈’이란 말도, ‘스트라이크·볼·포볼·아웃·세이프’라는 말도, 공치기가 낯선 동무한테는 모두 어질어질할 뿐입니다.
문득 생각에 잠깁니다. 동무 말이 틀리지 않아요. 던지는 사람이라면 ‘던짐이’라 하고, 받는 사람이라면 ‘받는이’라 할 만합니다. 치는 사람은? ‘침이’는 좀 엉성하고, ‘때림이’쯤이면 어울릴까요?
죽었나 살았나
공을 치고받는 놀이를 처음 하려는 동무하고 나란히 앉아서 지켜보기로 합니다. 같이 지켜보면서 하나하나 짚어 주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얼른 ‘송구’해!”란 말을 듣더니 ‘송구’는 또 뭐냐고 묻습니다. “‘던지라’는 뜻이야.” “던져야 하면 ‘던지라’고 하면 되지, 왜 이렇게 어렵게 말하냐?”
타자, 아니 때림이가 방망이를 휘두릅니다. 누구는 ‘방망이’라 하고, 누구는 ‘배트’라 합니다. 섞인 두 말을 들은 동무는 또 묻지요. “‘방망이’는 뭐고, ‘배트’는 뭐냐?” “응, 둘 다 같은 걸 가리키는 말이야.” “같은 거라면서 왜 말이 다르냐구?” “그게, 하나는 영어이고, 하나는 우리말이야.” “뭔 공을 치는 놀이를 하면서 영어까지 다 써야 하냐. 우리말로는 못 하냐?” “난들 아니. 텔레비전을 보면 다들 두 가지 말을 써.”
드디어 깡 소리가 나면서 공을 때립니다. 또는 칩니다. 통통 튀는 공을 받아서 던집니다. 어린이끼리 하는 공치기이니 으레 옥신각신합니다. “세잎이야!” “아니 아웃이야!” “아니야, 세이프라고!” “세잎!” “아우트!” 동무는 또 묻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어린이로서 ‘세입·세이프·세잎’하고 ‘아웃·아우트’란 말이 섞입니다. 게다가 “살았어!” “죽었어!” 같은 말도 섞여요. 동무가 묻기 앞서 손부터 살레살레 젓습니다. “공을 쳤으면 저쪽에 깔아놓은 천조각을 빨리 밟아야 해 …….”
왼날개도 오른날개도 어지러워
가만 보니 야구라 하는 공치기에 동무를 섣불리 끌어들일 수 없구나 싶습니다. 어쩐지 동무한테 미안합니다. 공을 쳐서 하늘로 뜨면 ‘뜬공’일 텐데 ‘플라이볼’이라고들 합니다. 공을 쳐서 땅을 구르면 ‘구름공(구르는공)’이나 ‘땅공’일 텐데 ‘땅볼·바운드볼’이라 합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포볼·볼넷’이라 섞어 쓰는 말도, 또 “들어왔어!” “안 들어왔어!” “스트라잌이야!” “볼이야!” 하고 섞어 쓰는 말도, 이밖에 이런저런 때에 쓰는 요런조런 말을 놓고서 머리가 핑핑 돕니다.
같이 야구, 아니 공치기를 하던 동무들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서 먼저 일어나기로 합니다. 야구장 옆에 살지만 야구를 모르는 동무를 집에 데려다주기로 합니다. 둘이 터덜터덜 걸으며 조용합니다. 할 말이 없더군요. 저는 다른 동무들하고 으레 공치기를 했던 터라 공치기에서 쓰는 온갖 말이 어떤 말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서 그냥 썼어요. 어른들이 쓰는 말을 고스란히 따라서 썼지요. 바른 말 그른 말을 떠나, 한국말이냐 아니냐를 떠나, 왜 어떤 뜻으로 그 자리에 쓰는가를 제대로 짚는다거나 헤아린 적이 없구나 싶더군요.
서로 처음 맞붙을 적에 외치던 ‘플레이 볼!’도, ‘좌익수·중견수·우익수’가 뭔지 풀이해서 알려주려던 말도, 어떤 어른이 왜 이런 이름을 붙여서 쓰는가를 참으로 그때까지 생각한 일이 없다고 새삼스레 깨달았습니다. 어른들이 그냥 쓰는 말을 멋모르고 따라하면서 ‘전문 야구용어를 쓰니까 멋지다’는 마음, 이른바 겉치레에 빠져들고서 겉치레인 줄 몰랐구나 싶었어요.
‘체육’은 뭘까?
학교에 ‘체육(體育)’이란 이름인 수업이 있습니다. 학교에 ‘운동장(運動場)’이란 이름인 너른터가 있습니다. 학교를 다니며 이런 이름을 곧이곧대로 외워서 쓰기만 했습니다. 가만 보면, 교사인 어른 가운데 이런 이름을 제대로 풀이해서 들려준 분은 없었지 싶습니다. 어른들도 다른 사람들이 지어 놓은 이런 말을 그냥그냥 따라서 쓸 뿐입니다.
몸을 가꾸거나 기른다면 ‘몸가꾸기’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움직이는 곳이라면 ‘움직마당’ 같은 이름을 붙일 만할까요? 학교에서는 ‘몸가꾸기’라든지 ‘놀이마당·어울림마당’ 같은 이름으로 쉽게 고쳐서 쓸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전문말이라 하더라도 전문꾼 자리에 선 사람끼리 알아들을 말이 아닌, 전문꾼 아닌 자리에 있는 여느 사람 누구나 곧장 알아들으면서 어깨동무할 만한 말을 새롭게 생각하고 살펴서 하나씩 보듬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길이름(도로명)으로 사는터(주소) 이름을 바꾸었는데, ‘광주’란 이름도 ‘빛고을’로 바꿀 수 있을까요? ㅅㄴ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