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2일, 순천 동남사에서

사진강의를 합니다.

이 자리에서 펼 이야기 가운데 한 자락을

이렇게 추슬러 놓습니다.

즐겁게 사진을 누리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숲노래 책노래] 사진책


1998.7.14. “어이, 최종규 씨, 사전 쓰는 일 하지?” “네, 그렇지요.” “그러면 이 사진책도 좀 보지 그래?” “네? 사진책이요?” “그래. 말만 나온 책만 보지 말고, 이제는 사진이 나온 책도 좀 봐.” “어, 그런가요?” “잘 봐. ‘아미쉬’라는 이름은 어떻게 풀이할래? 아미쉬 사람들이 입은 옷이나 타고다니는 마차를 보지 않고서는 아미쉬 사람들을 풀이할 수 없잖아? 뭐, 아미쉬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 같이 살아 본다면 사진책을 안 봐도 되겠지만, 모든 나라 모든 곳에 다 찾아가서 두 눈으로 볼 수는 없잖아? 그런 때에 사진책이 무척 좋다고. 이 아미쉬 사진책을 좀 봐. 때로는 사진 하나로 백 마디 말을 담아내는 풀이를 할 수도 있어. 라루스 사전이 그래. 굳이 말로 풀이하지 않고서 그림이나 사진을 넣기도 하거든.” “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여태 사진책을 볼 생각을 안 했는데, 이제부터는 사진책도 찬찬히 봐야겠습니다.”

2001.3.12. “야, 이 사진책 좋기는 한데, 비싸지 않냐?” “네, 값이 좀 세기는 합니다만, 이만 한 사진을 담은 사진책이 드물어요. 이 책값은 이 사진 하나가 다 벌어 줍니다. 이 엄청난 사진 하나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돈을 줄였다고도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엄청난 사진 하나이니, 우리는 이곳에 갈 찻삯이며 품이며 안 들여도 될 뿐 아니라, 몇 달이나 몇 해라는 나날까지 벌어들인 셈이에요. 그렇게 치면 이 사진책 하나를 우리 사전을 짓는 길에 자료로 삼으려고 사들이는 값은 매우 싸다고 할 수 있어요.”

2003.5.22. “집에 사진책이 꽤 많으시네요? 사진을 전문으로 하세요?” “아닙니다. 저는 사전을 씁니다.” “네? 그런데 웬 사진책이 이렇게 많아요?” “사전을 쓰는 사람이니까 사진을 같이 봐야 해요.” “어, 왜요?” “생각해 보셔요. ‘옷’이라고 해도 오늘 우리가 입는 옷이 있지만, 1950년대에 입는 옷하고 다릅니다. 1850년대에 입는 옷하고도 다를 테며, 1550년이나 550년이나 기원전 옷하고도 다르겠지요. 이 모든 다 다른 옷을 모두 사진으로 담아내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한때 차림새는 사진으로 담겨요. 그 사진을 읽으면서 더 예전에는 어떤 옷을 두르고 살았을까 하고 어림하지요. 옷 하나를 보기로 듭니다만, 낱말 하나도 매한가지예요. 어느 낱말 하나를 제대로 파헤쳐서 알아내고 뜻이나 결을 밝히자면, 그 낱말이 살아온 길을 모두 헤아려야 해요. 그런 길에서 사진책은 대단히 고마운 곁책이 되어 줍니다.“

2007.4.5. 사진이란 삶을 사랑하는 빛. 이 빛살이 넘쳐흘러 가슴이 풍덩 잠기도록 출렁거리는 이야기꾸러미가 사진책.

2010.6.6. 사진책은 ‘사진 작품집’이 아니다. 예술을 하든 작품집을 꾸미든, 이렇게 해서 나오는 사진책도 더러 있다. 그러나 사진책이란, 사진으로 삶을 이야기하면서 노래하는 살림을 갈무리하는 책이다. 사진으로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작품집이란 이름은 붙일 수 있을 터이나 ‘사진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첫 쪽부터 끝 쪽까지 사진을 줄줄이 담아내어야 사진책이 되지 않는다. 사진책이란, 사진만 있는 책이 아니다. 사진책이라면, 삶과 살림과 사람을 사랑이라는 눈으로 슬기롭게 살피면서 새롭게 이야기를 지피는 책이라고 해야 걸맞는다고 느낀다.

2019.7.11. 어느 사진이 깃든 어떤 사진책을 마주하든, 이제껏 보거나 읽은 사진·사진책을 먼저 마음에서 지워 놓고서, 텅텅 비운 마음으로 마주하려고 한다. 내 앞에 있는 사진·사진책은 새로운 빛결을 담은 이야기가 흐르니, 이 이야기를 읽자면 모든 옛생각(선입관·지식)을 잊어야 한다. 옛생각을 티끌만큼이라도 품은 채 새로운 사진·사진책을 마주한다면, 옛생각이라는 틀로 읽고 만다. 새로운 빛결을 해묵은 눈으로 읽는다면 무엇을 느낄까. ‘바지 입은 가시내’는 가시내인가 사내인가? 가시내일 테지. ‘치마 입은 사내’는 사내인가 가시내인가? 사내일 테지. ‘바지 = 사내’이지 않고 ‘치마 = 가시내’이지 않다. ‘짧은머리/박박머리 = 사내’인가? ‘긴머리 = 가시내’인가? 아니다. 사내이든 가시내이든 머리카락을 짧게 치고 싶으면 짧게 칠 뿐, 그대로 두어 길게 나풀거리고 싶으면 이렇게 할 뿐이다. 틀에 박힌 눈을 품은 채 새로운 빛결을 마주하려 하면 아무것도 못 보고 만다. 속살뿐 아니라 겉모습조차 제대로 못 본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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