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30. 못 알아듣겠소만



  ㅇ이라는 매체에서 제 사진을 몰래 가져다가 쓰면서 그 사진이 마치 ㅇ이라는 매체 것인 듯이 다뤘습니다.


  자, 저는 두 가지 말을 썼어요. ㅇ이라는 매체가 “몰래 가져다가 썼다”는 말이랑 “저희 것인 듯이 다뤘다”고 했습니다. 이를 법으로는 “저작권 침해” 또는 “무단 도용”이라 하고, “성명표시권 위반”이라 합니다. 앞엣말은 우리 집 아이들한테도 들려줄 수 있으나, 뒤엣말은 아이들이 못 알아들어요. 더구나 뒤엣말은 곁님도 못 알아듣습니다.


  제 사진을 몰래 가져다쓴 곳은 저한테 “잘못했습니다” 하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사과’를 하지 않았어요. 이때에도 두 갈래 말이 있어요. 아이들은 ‘사과’라는 한자말을 못 알아듣기 마련입니다. 어른들이 으레 쓰니 그냥 따라서 쓸는지 몰라도 말뜻은 제대로 모르지요. 생각해 봐요. 아이들한테 ‘사과’란 ‘능금’이란 열매입니다. ‘능금’을 가리키는 ‘사과’도 한자말이지만, 먹는 열매인 ‘사과’는 누구나 알아들어요.


  아무튼 ㅇ매체하고 전화로 얘기를 할 적에 물어봤지요. “잘못을 한 줄은 아십니까?” 하고요. 이때에 그곳 기자는 “좋은 뜻으로 썼는데…….” 하고 대꾸합니다. 이런 대꾸를 들으며 매우 어이없기도 하고 바보스럽기도 하구나 싶었습니다. 좋은 뜻이라면 거꾸로 그 매체에서 쓴 글이나 사진을 제가 마음대로 가져다가 몰래 써도 되려나요?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요. 그 매체에 깃들어 일한다는 변호사 한 사람이 저한테 누리글월을 띄웠는데, 이 누리글월은 꼭 한 줄짜리입니다.


* 회사 내부 품의로 인해 금액 지급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변호사는 이런 말을 쓰는구나 하고 새삼스레 생각했습니다. 이러니 여느 사람들이 법하고 얽힌 일이 생기면 매우 힘들어하는구나 싶더군요. 왜 이 나라 법마을은 잔뜩 부풀리는 한자말을 즐겨쓸까요?

  그런데 ‘품의’란 뭘까요? 이 변호사한테 맞글월을 띄워 ‘품의’가 무슨 뜻인지 물었으나 다시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 스스로 사전을 뒤적이기로 합니다.


 [품의(稟議)] 웃어른이나 상사에게 말이나 글로 여쭈어 의논함


  ‘품의’란 한자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이 있는 줄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한자말을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 변호사는 저한테 이런 한자말을 끼워넣은 누리글월을 띄웠을 테지요.


  자, 곰곰이 생각해 봐요. 웃사람한테 어느 일을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 하고 말을 걸 적에 가리키는 높임말이 있습니다. 바로 ‘여쭈다·여쭙다’입니다. ‘품의’ 뜻풀이에도 ‘여쭈어’라는 대목이 나와요.


  예부터 웃사람한테는 ‘여쭌다’ 하고, 또래나 손아랫사람한테는 ‘묻는다’ 합니다. 법마을에서도 ‘여쭈다·여쭙다’를 쓰면 될 노릇이라고 여깁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쓸 적에 아름다이 어깨동무를 하는 터전을 이루리라 봅니다. ‘여쭈다·여쭙다’가 아닌 ‘품의’를 써야 높임말이 되지 않습니다. ‘품의’를 써야 법마을다운 말씨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 앞서 《타인을 안다는 착각》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책이름은 영 엉성하구나 싶습니다. 이렇게밖에 설익은 이름을 붙이나 싶어 아쉽습니다. 이러면서 생각했어요. 저라면 책이름을 어떻게 붙일까 하고요.


 남을 안다는 설눈

 이웃을 안다며 설치기

 너를 안다며 설치다


  내가 아닌 사람은 ‘남’입니다. 나랑 맞댄다면 ‘너’입니다. 가깝게 여기고 싶으면 ‘이웃’입니다. 구태여 ‘타인’ 같은 한자말은 안 써도 좋습니다.


  다음으로 ‘설-’이란 말씨를 떠올립니다. ‘설익다’나 ‘설미지근하다’나 ‘설되다’나 ‘설자다’란 말이 있어요. ‘설다’에서 앞머리를 뗀 말씨예요. 제대로 되거나 있거나 하지 못하거나 않을 적에 ‘설-·설다’를 써요. 제대로 생각하지 않거나 바라보지 않는다면 ‘설생각·설살피다’나 ‘설눈·설짓’이라 할 만합니다. 그래서 설눈으로 본다거나 설짓을 일삼을 적에 ‘설치다’라 해요.


  ‘설-’을 붙이는 말씨를 새롭게 생각하노라니, ‘살-’을 붙이는 말씨는 어떤가 하는 생각이 잇따릅니다. ‘살-’을 붙인 낱말로 ‘살얼음·살얼음판’이 떠오릅니다. ‘살얼다’라 쓰는 분이 드문드문 있으나, 사전에는 이 낱말이 올림말로는 없습니다. “살짝 얼다”는 뜻으로 ‘살얼다’를 다룰 만합니다.


  이 얼거리를 바탕으로 “살짝 보다”를 ‘살보다’라 하거나, “살짝 읽다”를 ‘살읽다’라 할 만해요. 맛보기를 하듯 살짝 먹을 적에는 ‘살먹다’라 할 수 있어요. 낱낱이 듣지는 않지만 가볍게 듣거나 살짝 들으니 ‘살듣다’라 할 수 있고요.


  살짝 읽으니 ‘살읽다’라면, 어설피 읽으니 ‘설읽다’입니다. 살짝 들으니 ‘살듣다’라면, 어설피 들으니 ‘설듣다’예요.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씨라 하듯, ‘살-·설-’을 사이에 두고 요모조모 쓰임새가 맞도록 여러 말을 즐겁게 지을 수 있어요. 밑글을 가볍게 쓸 적에는 ‘살쓰다’요, 글을 썼다지만 영 어설프다면 ‘설쓰다’입니다. 가볍게 맛을 본 ‘살먹다’라면, 어설프게 먹어 맛도 모르겠고 배도 고프다는 ‘설먹다’가 되어요. 가볍게 ‘살웃음·살웃다’라면, 웃는지 우는지 영 아리송한 ‘설웃음·설웃다’가 되어요.


  ㄷ이란 일터에서 ‘내부고발’을 했다는 분이 여러 해째 모질게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잘못이 바로잡히기를 바라면서 속얘기를 밝혔다는 그분은 끔찍하도록 들볶인다고 해요. 나라를 다스리는 꼭두머리를 갈아치워도 이런 일은 끊이지 않는다니 안타깝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떤 이웃님은 ‘내부고발’이 아닌 ‘공익제보’를 했다고 말해야 올바르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렇지요. ‘공익’을 바라는 목소리를 냈다고 여겨야 알맞겠지요.


  한 가지 일을 놓고서 바라보는 눈이 달라요. 이러면서 우리가 쓰는 말도 다릅니다. 꾸밈없이 밝히거나 보여주는 말이 있다면, 뭔가 가리거나 꿍꿍이를 담은 말이 있습니다. ‘내부고발’하고 ‘공익제보’는 서로 어떤 목소리일까요?


  그런데 있지요, 두 가지 말 모두 아이들한테는 어렵습니다. ‘공익제보’로 쓰면 한결 낫기는 할 테지만, 아이들 자리에서 보면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무엇을 나타내는지 헤아리기가 만만하지 않아요.


 참소리. 참말


  바깥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참되지 않다면, 이는 거짓모습입니다. 여느 사람들은 참모습을 모르는 채 거짓모습을, 이른바 허울이나 껍데기만 본다고 할 만합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참모습을 늘 지켜보거나 알 테지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는 참모습을 밝히는 목소리라면 ‘참소리’라 할 수 있어요.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은 모습을 환히 드러내려는 목소리를 ‘참소리’라 하면 어떠할까요? ‘내부고발’이나 ‘공익제보’를 이런 말씨로 담아내면 어울릴까요?


  아이들하고 함께 나눌 말씨를 헤아리니, 저라면 ‘참소리’나 ‘참말’이란 낱말을 쓰겠습니다. 때로는 ‘참외침’이나 ‘참뜻’이나 “참을 밝히다”라 할 수 있어요. 어른끼리만 나눌 말이 아닌,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할 말을 쓰고 싶습니다. 못 알아듣겠는 어른 무리 말씨라든지, 슬픈 떼거리 얄궂은 말씨는 땅에 파묻어 거름이 되도록 하고 싶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