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씁니다 ― 38. 꾸러미



  영화 〈말모이〉가 나왔습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이 퍽 많습니다. 이 영화가 나와서 참으로 많은 분이 보시기 앞서까지 ‘말모이’라는 이름은 아주 구석자리에 밀려난 채 조용히 스러지던 참이었습니다. 이제는 ‘말모이’를 섣불리 얕잡거나 깔보는 물결은 웬만해서는 안 일어날 만하지 싶습니다. “말을 모았”으니 ‘말모이’라 할 뿐인 줄, 글을 모으면 ‘글모이’가 되고, 책을 모으면 ‘책모이’가 되는 줄 찬찬히 헤아리기도 하겠지요. 곰곰이 보면 옛어른은 ‘사전’이라는 한자말을 우리 나름대로 ‘말모이’라는 이름으로 담아냈구나 싶습니다. 이런 이름도 무척 어울립니다. 좋아요. 그러나 저는 그리 와닿지 않았어요. 저는 좀 새롭게 낱말을 살피고 싶더군요. 그렇다고 마땅하다 싶은 이름을 얻지 못했어요. 1994년에 ‘낱말책’이란 이름을 지은 적이 있습니다만, 어쩐지 엉성하다고 여겼어요. 이러다가 2019년 올봄에 머리를 벼락처럼 스치는 한 마디가 있어요. ‘꾸러미’예요. ‘꾸리다’하고 맞물리는 이 낱말은 “짐을 꾸려 집을 옮기다”나 “짐을 꾸려 마실을 가다”처럼 씁니다. ‘꾸리다·꾸러미’는 모든 짐을 다 챙기거나 모으는 모습이나 몸짓을 가리키지 않아요. 온갖 짐 가운데 꼭 쓸 만한 짐을 바로바로 쓰기 좋도록 건사하거나 가지런히 갈무리하는 모습이나 몸짓을 가리켜요. 사전이라는 책이 그래요. 모든 낱말을 통째로 싣지 않아요. 온갖 낱말 가운데 우리가 삶이며 살림이며 사랑이며 사람을 새롭게 바라보고 배우도록 북돋울 낱말을 알뜰히 추려서 정갈히 갈무리합니다. 그러니 ‘꾸러미 = 사전’이에요. ㅅㄴㄹ



꾸러미


바람이 확 불어

나뭇가지가 손뼉치는 물결

차르랑차르랑 들으며

냉이꽃 한 묶음 뜯어


햇빛이 쭉 들어

감나무 새잎 반짝반짝 웃음

눈이 부신 아침에

시금치 두 단 무치지


실개울이 조르롱 흘러

송사리 무리 헤엄치는 놀이

오솔길 달리다가

시원한 숨 세 모금 들이켜


아버지는 우리 쓰는 말

차곡차곡 모아서

가지런히 옮겨적더니

재미난 말꾸러미 지어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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