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검문
겪지 않으면 쓸 수 없기 마련이다. 겪지 않고서 쓴다면 거짓이기 마련이다. 적어도 꿈에서라도 겪어야 비로소 쓸 수 있다. 이를테면 ‘불심검문’을 겪지 않은 채 ‘불심검문’을 이야기로 쓸 수 있을까? 아마 이 낱말이 무슨 뜻인지부터 모르기 쉽고, 낱말뜻을 알아도 살갗으로 안 와닿겠지. 서태지 노래가 나올 즈음에도 길거리에서 불심검문이 흔했다. 정태춘·박은옥, 안치환, 조국과청춘, 꽃다지, 노찾사 같은 님들이 아닌 서태지조차 엉망인 나라꼴을 두고서 ‘사전 심의 철폐’에 한목소리를 보탰을 만큼, 1990년대까지 이 나라는 지긋지긋했다. 1994년을 떠올리고 1990년대가 저물던 해를 되새긴다. 그때에 젊은이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걸으면 전투경찰이나 사복경찰이 으레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하면서 책을 빼앗곤 했다. 나처럼 길을 걸으면서도 책을 읽는 사람은 툭하면 불심검문을 받아야 했다. 불심검문이 지겨워 길을 걸을 적에는 말랑말랑한 책을 옆구리에 끼고 걷거나 건널목에서 서곤 했다. 문득 생각한다. ‘책을 아끼고 사랑하며 즐겨읽는 젊은이’는 ‘생각이 얌전하지 않다’고 여기면서 잡아채거나 구치소·닭장차에 함부로 가두거나 책을 마구 빼앗아가던, 그런 물결이 얼마나 길었는가. 꼭 불심검문 때문만은 아니나, 이 나라는 젊은이가 책을 멀리한 채 술 마시고 노닥거리고 이쁜 옷 차려입고 놀러다니라고 참 오랫동안 부추겼고, 연속극이나 영화도 온통 노닥질투성이였으며, 아직도 이런 흐름이 꽤 짙으니, 수수하게 여느 자리에서 책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살림이란 얼마나 아득할까. 2019.4.5.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