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 3

《보리 국어사전》 짓는 일을 그만두기로 하면서 이 나라 책마을에 대단히 신물이 났다. 어른이라는 분들은 왜 이렇게 거짓말을 할까? 어른이라는 분들은 왜 그렇게 일을 헤살놓거나 망치려 할까? 2003년 8월 31일에 사전 편집장 이름을 내려놓기로 하면서 열 해 동안 속이 쓰린 채로 살았다. 이러던 어느 날 철수와영희 출판사 대표님이 넌지시 한말씀 한다. “종규 씨, 옛날 일은 이제 그만 얘기하기로 해요. 옛날 일로 받은 상처가 있으면 종규 씨가 새로운 사전을 써서 그 상처를 지워 보세요. 우리는 새로운 걸음을 내딛어야 하잖아요? 자꾸 옛날 일로 아파하면 앞으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종규 씨가 예전에 쓰려고 하다가 못 쓴 사전 있잖습니까, 우리 출판사가 작고 모자라고 힘도 없지만, 우리가 내 보면 어떨까요? 다만, 우리 출판사 규모가 작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이 찍거나 널리 홍보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전을 만나면 입소문을 알아주고 사 줄 테니, 천천히 빛을 볼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볼을 타고 주르르 눈물만 흐를 뿐 아무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울면서 술 몇 잔을 기울인 끝에 대꾸한다. “네, 고맙습니다. 그래요, 새로운 사전을 써야겠네요. 그런데 새로운 사전은 새로운 이름이어야겠어요.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국어사전’은 틀린 이름, 아니 엉터리 이름입니다. ‘국민학교’란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꿨잖습니까. 왜 바꾸었느냐 하면 ‘국민’은 일제강점기에 천황이란 이름으로 이 나라를 짓밟고 억누르면서 붙인 이름, 우리를 그들 종으로 삼으려고 붙인 이름이에요. 그런데 ‘국민’만이 아니에요. ‘국(國)’이란 한자가 붙은 모든 한자말이 그때 그런 이름이에요. ‘국어사전’에서 ‘국어’도 ‘일본 우두머리를 하늘처럼 섬기면서 따르는 종이 되려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란 뜻입니다. 무시무시하지 않나요? 비록 사람들은 왜 국어사전 아닌 ‘한국말사전’이란 이름을 쓰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할 테고, 낯설어하며 핀잔도 하겠지요. 그러나 새로운 사전은 참말로 새로운 이름이어야지 싶어요. 갈아엎어야지요. 오래 걸리거나 더디더라도 제걸음을 가야지요. 기쁘게 기꺼이 할게요. “새롭게 살려낸 한국말사전”을 쓰겠습니다.” 2013.9.1. (* 덧말 : 이렇게 얘기하고 다짐한 책은 2016년에 드디어 마무리를 지어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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