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전아현 옮김, 강정선 그림 / 계수나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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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책시렁 187


《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전아현 옮김

 계수나무

 2007.11.19.



나이구는 그날 하루 종일 코가 다시 길어지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래서 불경을 외다가도, 식사를 하다가도, 틈만 나면 조심조심 코끝을 만져 보았다. 그러나 코는 입술 위에 얌전히 달려 있을 뿐, 더 늘어날 낌새는 없었다. (22쪽)


그러나 인간은 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두운 데서도 사물을 잘 구별하고 희미한 냄새로도 알아맞히는 개의 재능을 배울 수 없는 것이다. (38쪽)


너를 내 제자로 삼겠다고 했지만, 훌륭한 신선이 되고 안 되고는 온전히 네 하기에 달렸으니까. (73쪽)


“아, 지금 막 떠올랐는데, 내게 태산의 남쪽 기슭에 집이 한 채 있지. 그 집과 텃밭을 내게 줄 터이니 거기에 가서 살아라. 지금쯤이면 집 주위에는 온통 복숭아꽃이 피어 있을 것이다.” (95쪽)



  걱정을 하기 때문에 새롭게 걱정이 쌓이고, 웃기 때문에 새롭게 웃습니다. 이런 삶결을 놓고 예부터 콩 심은 데에 콩이 난다 하고, 팥 심은 데에 팥이 난다 했습니다. 얼핏 들으면 너무 마땅하다 싶어서 지나치기 쉬운 옛말이요, 곰곰이 따지면 삶이 흐르는 결이나 밑틀을 찬찬히 짚는 오랜 슬기입니다.


  스스로 달라지려고 애쓰기에 어느새 스스로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주저앉고 마니까 어느덧 스스로 주저앉기를 되풀이하다가 아예 손을 놓습니다. 남 탓을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 누구 탓으로 돌릴 겨를이 있다면, 스스로 더 마음을 기울이거나 기운을 낼 노릇일 뿐입니다.


  《코》(아쿠타가와 류노스케/전아현 옮김, 계수나무, 2007)라는 책은 어른문학으로 이름이 높은 분이 빚은 어린이문학입니다. 일본에서는 아쿠타가와 상이라 하면 으뜸으로 치는데, 《코》를 읽으면서 일본 옛이야기에 옛살림하고 옛슬기를 잘 풀어낸 숨결을 읽으면서, 으뜸으로 칠 만하구나 하고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뭔가 가르쳐 주기에 훌륭한 글이나 이야기가 아닙니다. 빙그레 웃거나 까르르 웃거나 깔깔 웃는 사이에 문득 배우기도 하고 생각을 새로 가다듬도록 북돋우니까 훌륭한 글이나 이야기가 됩니다.


  남다르거나 처음 듣는 이야기를 다루지 않아도 됩니다. 살면서 누구나 겪는 흔한 이야기를 다루면 됩니다. 누구는 코에 자꾸 마음이 가면서 삶을 놓치거나 미룹니다. 누구는 얼굴에, 다리에, 머리카락에, 손등에 자꾸 마음이 가느라 삶을 놓치거나 미룹니다.


  다만 코나 얼굴을 자꾸 들여다볼 수 있고, 자꾸 들여다본다고 해서 나쁘지 않습니다. 자꾸자꾸 들여다보며 자꾸자꾸 생각을 기울이고, 생각을 기울이면서 새길이나 새살림을 스스로 트도록 슬기로운 마음이 되면 넉넉해요.


  작은아이가 설거지를 미룹니다. 살짝 나무랄 수 있지만 능금 한 알을 깎아 달라 하면서 설거지는 제가 맡습니다. 작은아이가 놓치거나 잊거나 미루는 일을 제가 넌지시 하면서 다른 일을 맡겨 보아도 재미있습니다. 언젠가 문득 느끼거나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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