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글이네
모두 글이 된다. 몸살이 나서 나흘 동안 물조차 마시기 힘들던 나날도, 몸살이 지나간다 싶더니 옆구리가 결려 엿새째 끙끙 앓는 나날도 글이 된다. 옆구리 결림을 더 적어 본다면, 옆구리가 결리니 숨을 쉬다가 아프고, 설 적에도 앉을 적에도 누울 적에도 허리를 굽히려 할 적에도 쪼그릴 적에도, 그러니까 뭘 해도 그때그때 칼로 옆구리를 푹 쑤시는구나 싶도록 아프다. 이렇게 아프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끼니, 이런 아픈 이야기는 얼마든지 글이 된다. 며칠 앞서 누리책집 예스24에서 ‘으름질’을 했다. 예전에는 사내들이 으레 으름질을 했지만, 요새는 가시내도 으름질을 한다. 사내만 으름질을 하지 않는다. 사내이든 가시내이든 ‘힘하고 이름하고 돈을 쥔 자리에 서되 스스로 슬기롭지 않고 바보스러운 넋이나 삶이나 몸짓’이라면 그만 으름질을 하고 만다. 생각해 보라. 성평등이란 무엇인가? 가시내가 손에 물을 안 묻히고 집안일을 안 하는 길이 성평등인가? 아니다. 사내이든 가시내이든 손에 물을 안 묻히고 집안일을 안 한다면 ‘누구인가 해야’ 한다. 이때에 그 ‘그 누구’는 누구인가? 아버지가 안 하던 옛날에는 어머니가 했다. 오늘날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 하니, ‘할머니’가 하거나 ‘가정부’를 비정규직으로 들여서 하겠지. 또는 돈으로 밥집에서 사다가 먹는다든지, 손전화를 눌러 먹을거리를 집으로 갖다 주도록 하면서 사다가 먹을 텐데, 이때에도 ‘손에 물을 묻히는 일’을 남들이 비정규직으로 하기 마련이다. 자, 이때에 무엇이 성평등이거나 평화일까? 으름질은 사내가 해도 볼썽사납지만 가시내가 해도 볼썽사납다. 다시 말해, 으름질이란 누가 해도 볼썽사납낟. 으름질은 어른이 해도 어린이가 해도 볼썽사납다. 신문사 우두머리네 집안 어린이가 으름질을 할 적에 이 으름질이 귀여워 보일까? 아니다. 똑같이 으름질일 뿐이다. 사내한테서 힘하고 이름하고 돈을 거머쥐는 자리를 빼앗은 가시내는 이 대목을 좀 헤아릴 노릇이라고 느낀다. 그 ‘권력’이라는 자리를 빼앗으려 하지 말자. ‘권력 없애기’를 하자. 권력이란 자리에 예전에는 사내가 들어앉았다면 요새는 ‘지식인 가시내’가 들어앉은 모습이다. 성별을 뛰어넘고, 인종이나 나라를 뛰어넘고, 어른이나 아이를 뛰어넘고, 학벌이나 지연 같은 쓰잘데기없는 줄긋기를 뛰어넘고, 몽땅 뛰어넘거나 내려놓고서 즐겁게 손잡고 노래하는 길을 가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리하여 모든 이야기는 글이 된다. 꾸밈없이 바라보기에 글이 될 수 있다. 으름질을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어루만지기에 글이 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